사랑과 두려움 사이, 아버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연습
나와 아버지와 관계는 모순적이다.
분명히 사랑도 느껴졌지만 그 옆엔 두려움도 함께였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감정이 격해졌던 건
단순한 반항심 때문이 아니었다.
통제에 대한 반발.
존중받고 싶은 갈망.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부당함.
이 모든 감정들이 내 마음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버지는 시골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중학교 교감이셨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많이 맞기도하고 혼나면서 자라셨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야구선수였던 아버지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운동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운동장에서 쏟아낸 악바리 근성은 그대로 공부로 옮겨졌고
홀어머니와 남매를 지켜야 한다는 무게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 결과 명문대에 입학했고
이후 대기업에 입사한 아버지는
주 7일 출근과 밥먹듯 하는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족 여행 중에도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 한 통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만 남긴 채
어머니와 우리를 남겨두고
훌쩍 떠나셨다.
가족을 위한 강력한 책임감,
그렇게 열심히만 사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성공 방정식’을
아들에게도 물려주려고 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높은 기대치와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주말이면 아버지의 회사에 끌려갔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해야 했고,
문제 하나 틀릴 때마다 매가 돌아왔다.
한대라도 덜 맞을려고
나는 늘 초긴장 상태로 문제를 풀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공부는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다.
그날의 공부가 끝나면
같이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질 없는 온기, 조용한 물소리,
잔뜩 긴장된 시간이 오늘은 종료되었다는 해방감
그 시간이 유일한 해방이었다.
맞는 건 싫었다.
당연히 싫었다.
만약 그저 그렇게 때리기만 했더라면
나는 일찍이 마음의 문을 닫았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매일 다짐했다.
‘진짜 독립만 하면 이 집은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수없이 가출했다.
그치만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랑과 폭력이
같은 손에서 동시에 쏟아졌다는 것이다.
헷갈렸고, 혼란스러웠다.
진심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밖으로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발은 집 안에 남았고,
마음만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어했다.
그렇게 나는,
순응과 반항 사이 어딘가에서 길들여졌다.
아버지에게 받은 기억 중
이상하게도 가장 따뜻하게 남아 있는 건
그의 말보다는 행동의 결이었다.
출근 전 새벽,
내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뽀뽀를 해주던 순간들.
잠결에 느껴진 그 손길의 온도와 말투는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
중학교 시절, 나는 학급 반장이었다.
하지만 체격이 작고 왜소했다.
힘이 센 아이들은 내 말을 쉽게 무시했고,
나는 반장이면서도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에 서 있었다.
매일 학교가 가기 싫었고 나는 더 작아졌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말없이 내 옆에 누워주셨다.
불을 끈 안방, 조용한 밤,
잠들기 전 아버지는 나직이 말했다.
“세상엔 자기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대통령조차도
주변에서 견제와 방해로 뜻대로 생각을 못펼치는 경우가 많잖니.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걔들이 뭐라해도 진심으로 대해줘.”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는 여전히 내 안에 있다.
나는 그 영향 아래에서 상처를 받고,
때로는 또다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아버지도 아버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려 했지만, 상처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
나는 아버지의 방식을
내 아이에게 그대로 물려주지 않기로 했다.
성과로 사랑을 증명받고,
두려움으로 행동을 조절하고,
존재보다 결과로 평가받는 삶.
그 방식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내 아들에게는
존중받고 있다는 감각이 몸에 배었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이 자연스럽게 새겨졌으면 한다.
공부를 잘해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받고 있다는 경험.
그게 아이의 마음에 남았으면 한다.
그래야만
타인의 시선 없이도 자기를 믿고,
실수하더라도 주눅들지 않으며,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당당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림자는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다.
때때로 지금의 내 마음을 흔들고
내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핮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고리를 어디서 끊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림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을 방법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