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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물질의 방 Apr 09. 2022

줄을 놓되, 줄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삶.

경제적 자유는 싯다르틴의 탁발과 같은 것.

비유경에서 인간은 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아래에는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고, 위에는 성난 코끼리가 미쳐 날뛰고 있으며, 흰 쥐와 검은 쥐는 위태롭게 늘어져 있는 그 줄마저 갉아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무에 걸린 꿀통에서 떨어지는 꿀을 받아먹느라 정신이 없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행복하기 위해?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떨어지는 꿀을 많이 받아먹으면 그것이 행복인가? 그 꿀은 무한한가? 무한하지 않다면 무엇이 행복인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등등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쏟아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다 보면 어김없이 싯다르타를 만난다. 삶을 고통이라 여기고, 모두 헛것임을 자각하는 순간 행복도 불행도 없는 곳, 즉 피안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줄에 매달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줄이 견고할 때에는 줄의 소중함을 모른다. 줄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줄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끊어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살아감과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다. 죽어간다는 자각,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줄에 매달려 모든 힘을 쏟는다. 삶과 죽음은 줄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내게 영향을 준다. 줄을 놓아버리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상대계에서 벗어나 절대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 또한 싯다르타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싯다르타는 일찍이 줄을 놓아버리고, 탁발을 하며 육체를 보전하며, 절대계로 나아가 깨달은 바를 전했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인간에게는 고리들이 많이 얽혀있다. 부모, 자식, 아내, 친구, 스승 등등...또한 모두가 싯다르타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줄을 놓았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인지해야만 한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좋음과 싫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절대계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줄을 놓아버리더라도, 줄에 매달려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정신은 자유롭게 해방되면서도 내게 얽힌 사회적 고리들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흐름의 고민 끝에 나름의 답을 내렸다.

줄에서 손을 떼고도 줄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는 싯다르타의 탁발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상대계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줄이고, 절대계로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양철학자, 동양철학자의 대부분은 귀족이었다. 말 그대로 태어나서부터 경제적 자유가 보장된 상태였던 것이다. 상대계를 대표하는 줄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절대계에만 관심을 가져도 되었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 놀라운 인사이트를 인류에게 선물했다.

워렌버핏은 "당신이 자는 동안 돈이 벌리는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면, 당신은 평생동안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평생 줄을 쥐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꿀에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줄을 놓고도, 줄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견고한 등산용 버클을 마련하자. 자유로워진 손과 정신을 이용해 내가 매달려있는 산을 보고,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강을 보고, 날아다니는 새를 보고,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나를 보자. 모두 보았으면 알게 될 것이다.

예수, 싯다르타, 소크라테스 등 성인들이 이야기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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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를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시간을 사고,
그 시간을 철학에 쓰는 이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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