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물질의 방 Mar 19. 2022

분별과 원죄

정확히는 모르나 성경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뱀의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다. 선악과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이 세상에 선과 악이 생겨났다. 지상천국이었던 이곳이 선악과를 먹게 되어 인간 사이의 다툼이 생겨났다고 전하고 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은 "공"이다. 색즉시공,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본질은 비어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잘게 부숴놓으면 그 형체가 없다. 물리계의 최소단위라고 알려져 있던 원자도 양자역학의 발전 이후에는 파동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실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텅 비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세상을 "공"으로 보지 못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 귀에 들리는 소리, 코에 맡아지는 냄새, 몸에 느껴지는 촉감을 실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를 "분별"이라 한다. 기독교 철학에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인간에게 "원죄"가 생겨났다면, 불교 철학에서는 이를 "분별"이라 이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잘게 부수어 놓으면 그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여겨 내 마음을 그곳에 내어준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모두 착각이다. 

내 몸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본인의 형상을 본 떠 인간을 만드셨고, 창조주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만드신 대우주라 여기면 그 형상을 본 떠 만들어진 인간은 소우주이다. 

대우주와 소우주는 연결되어 있다. 마치 얼음과 물처럼 말이다. 흐르는 물이 흘러가다가 유속이 느려지고, 기온이 내려가 얼어버렸다. 우리는 그 얼음의 실체를 물로 볼 것인가? 얼음으로 볼 것인가? 대우주와 소우주도 이와 같다.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에 불과하고, 나는 우주와 다르지 않다.



인간이 가진 '원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과 인간의 육근(눈, 코, 입, 귀, 몸, 뜻)의 '분별'을 없애는 행위가 지향하는 바는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 반드시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행동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로 이 땅에 태어났거나, 어떤 조건이 맞아 잠시 몸을 두르고 있든지 간에 반드시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 행동을 통해 우리는 '원죄'와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를 위한 이기적 동기를 가진 행동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착각을 강화시켜 '구분'과 '분별'을 길러낸다.

반대로 '남'을 위한 이타적 동기를 가진 행동은 '구분'과 '분별'을 줄여준다. 이를 소크라테스는 '계발된 이기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순수한 이타적인 행동은 종국에는 이기적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보시'라는 단어로 이타적 행동을 독려한다. 나아가 금강경에서는 '보시'를 하고도 상에 맺히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이를 '무주상보시'라 하며, 이타적 행동을 하고도 그 행동의 흔적을 어디에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어 내 마음속에도 말이다. 

인류의 오랜 삶을 건너 건너 전해지는 성인들의 뜻과 말씀을 통해 위와 같은 메시지가 담겨있다. 

나와 하나님이 다르지 않고, 나와 우주가 곧 하나라는 지혜를 통해, '성령'의 손을 잡고, '공'의 영역으로 나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지상천국일 것이다.

여기까지가 무신론자이자, 종교를 철학으로 여기는 회색분자의 덜 굳은 시멘트 같은 이야기였다.

작가의 이전글 천상천하 유아독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