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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물질의 방 May 17. 2023

삶이 시작된 날 생각해 보는 삶이 끝나는 날

언제부터인가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함께 떠올랐다. 좋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또는 [만족스럽다]는 의미인데, 마음에 들고 만족스러워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일도 함께 떠올랐다.

[생일]을 예로 들어볼 수 있겠다.

생일은 내 삶이 시작된 날이다. [삶]이 시작된 날이고, 사회적, 문화적으로 모두가 축하해 주는 날이니 좋은 날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데, 매년 생일이 되면 [삶]이 시작되었다는 감정과 함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감정도 함께 생겨났다.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내게 생일은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기쁨과 슬픔의 경계]

기쁨과 슬픔의 경계를 한번 느끼면, 두 가지 감정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쁨은 슬픔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반대로 슬픔은 기쁨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있다/없다], [좋다/싫다], [0/1]은 이것이 저것을 지어내고, 저것이 이것을 강화시킨다.

그래서 부처는 이야기했다.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그 형상이 없고, 좋고 싫은 마음도 그 실체가 없으며, 오직 원인과 결과로 [인과법]만이 존재한다고...

그렇게 나는 기쁨을 앞에 두면 슬픔을 떠올리고, 슬픔을 앞에 두면 기쁨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직도 기쁨이 크거나, 슬픔이 클 경우에는 반대편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 [경계]로   돌아오곤 한다.

경계에 있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마음]은 여러 성인과 철학자들이 완전한 인간상이라 여기며, 독려했다고 알려진다. 그 이상향에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방향이 맞는다면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기쁨] 속에서 [슬픔]을 떠올리는 것과
[삶] 속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연습은 내게는 결국 한 가지 목적을 지닌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앞두고 [삶]을 떠올리기 위함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환생], [사후세계] 등이 아니다. 일반적인 그것들은 지금 가진 [정신]과 [육체]의 영속성을 전제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죽음] 뒤의 [삶]은 지금 나라고 느끼는 [정신]과 [육체]라는 환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모든 인간이 향하는 죽음이라는 [해방]을 살면서 느낄 수 있다면 그 쾌감은 어떤 것보다 클 것이다.

[생일 生日]에 [사일 死日]을 떠올리는 것은 이런 면에서 생각보다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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