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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Sep 27. 2020

결국엔 바다로

바다를 옆에 두고 사는 사람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추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양적으로 많은 편이다. 예를 들자면 산책을 하다 퍼즐 조각 하나가 떨어진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웬, 퍼즐 조각이 떨어져 있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퍼즐은 무슨 그림의 조각일지 생각했다. 더 나가서는 퍼즐을 완성시킬 수 없게 된 아이 혹은 어른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그리고 비어 있는 마지막 조각을 내가 전해주면 드디어 완성하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할까, ‘그 퍼즐은 이미 버렸어요’라며 심드렁할까를 상상한다. 흔히 말하는 ‘소설 쓰고 있네’에서 소설을 쉬지 않고 줄기차게 쓰는 사람이 나인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은 상상이나 공상뿐만 아니라 걱정과 고민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해 걱정을 얹고 얹는다. 결국, 머리 위에서 각종 걱정이 섞여 하나의 덩어리가 되고 너무 무거워져 머리에 그대로 떨어진다. 나는 그 무게를 버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어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눌려 찌그러진다. 그리고 찌그러진 기분으로 몇 날 며칠을 보내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닌 이런 나도 쉴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나 머리가 복잡하고 엉망진창인 날에는 근처 바다로 간다. 찌그러진 몸을 이끌고 끝이 어딘지 모를 넓은 바다를 보고 있자면 파도가 내 머릿속까지 밀려 들어와 마구잡이로 엉키고 지저분한 생각을 부숴내고 쓸어간다. 파도가 그것들을 저 멀리 이끌고 가면 그제야 생각들에 꽉 막혀 있던 숨을 뱉는다.

 이런 이유로 대학 때는 맘 맞는 친구와 유난히 광안리를 자주 찾아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서 내 걱정 좀 가져가라고. 학교와 가까운 곳이 광안리라 하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서 우리는 ‘또광(‘또 광안리 왔다’ 혹은 ‘또 광안리 간다’ 줄임말)’이라는 말을 만들어 암호처럼 쓰기도 했다.


광안리 해변과 광안대교


 가만 생각하면(몸이 가만히 있으니까 또 생각을 시작한다) 바다에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은 바다와 오래 떨어져 못 살겠다 싶다. 바다는 이렇게 넓고 깊어서 해변의 모래만이 아니라, 걱정도 슬픔도 쓸어가 준다는데 바다를 등진 다른 곳에서는 누가 내 걱정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고 가져가 줄까. 적어도 나처럼 바다를 마주하고 살면서 파도가 힘든 마음을 쓸어가 준 적이 있다면 결국은 돌아 돌아 다시 바다로 올 것이다.




 몇 달 전 서울에 갈 일이 있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작가님의 신간이 나와 사인회를 진행한다고 해서 신청한 것이 당첨된 것이었다. 일단 사인회에 당첨된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서울에 간다는 사실도 꽤 설렜다. 요즘에 서울 가는 게 뭐 설렐 일인가 싶지만 나는 초등학생 때 단체견학으로 한 번, 대학생 때 공모전 취재로 한 번 간 것을 빼고는 서울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두 경험 모두 서울을 즐기고 온 것은 아니라 별로 생각나는 것은 없다. 이후 서울은 TV, 인터넷, SNS로밖에 볼 수 없었고 네모난 화면들에 비친 서울의 모습은 멋지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직접 본 서울이 내가 가진 환상만큼 멋졌냐면 그것은 아니지만, 왜 사람들이 서울에 살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문화적 접근성이랄지, 도로 정비랄지, 그 외의 시설들이 쾌적하게 이뤄져 있었으니까. 서울과 부산을 많이 오가서 서울 지리를 나보다 잘 안다는 이유로 나와 함께 가게 된 내 친구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서울에 살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고 나도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서울에서의 삶은 어떨지 상상했다. 하지만 이내 한강을 마주한 나는 서울에서는 영영 살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한강은 바다랑 참 다르구나.’ 거대한 물줄기를 보면서도 나는 더 넓은 바다가 보고 싶었다. 눈앞에 한강도 넓고 흡사 바다처럼 보였지만 그건 분명히 바다는 아니었다. 그냥 큰 강일뿐. 강과 바다의 차이. 이것은 스무 해가 넘도록 바다 가까이에서 산 나에게는 정말 크게 느껴졌다. 근본적으로 강이나 바다나 물로 이뤄졌다는 것은 같아도 그 물들이 모여 만들어낸 느낌은 달랐다. 물속은 알 길이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 한강은 너무 잔잔했다. 그 잔잔함은 촘촘해 보였고 내 수만 가지 생각과 감정은 들어갈 틈이 없이 느껴졌다. 냅다 고민을 던졌다가는 저 유순한 흐름이 끊기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나는 그 큰 강을 앞에 두고서도 파도치는 바다를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바다와 붙어살며 파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익숙한 사람은 어디로 가든 결국 바다로 돌아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남은 힘으로 무거운 것을 바다까지 나르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바다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쉴 새 없이 내 속으로 들이쳐올 파도를 만들 것이고 파도는 순식간에 마구잡이로 뭉쳐진 생각과 함께 부서질 것이다. 그리고 일어난 하얀 거품은 생각의 파편들을 안고 멀어져 갈 것이다.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도 겨우 왔다고 울상을 짓는 나를 보며 별것 아닌 듯 다 처리해준다. 이건 바다가 강처럼 잔잔하지 않기에, 강보다 더 넓고 깊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다를 떠나 살 방법도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갖가지의 무거운 덩어리들을 깨뜨릴 수 있는 바다 같은 사람이 되면 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너무 먼 이야기라서, 어쩌면 평생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없을 수도 있어서 일단 바다에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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