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타메일의 슬픔
나는 신체 동작의 조심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손가락만 세 번이나 부러졌다(게다가 전부 성인이 된 후에). 부딪히고 넘어지고 긁히고 베이고 찢어진다. 그럴 때마다 후회하고 ‘지금부터는 정신 집중해서 살아야지’라고 매번 다짐하지만, 흉터가 사라지기도 전에 또다시 새로운 상처를 얻는다. 이렇게 조심성 없는 내가 카페에서 일했던 것은 나름의 도전이었다. 커피를 서빙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2층까지.
이런 결심은 말년 병장으로서 구막사 관물대 앞에 누워 시청했던 <커피프린스 1호점>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많은 남성이 군 복무를 통해 뇌가 리셋되는데, 모종의 자신감까지 더해지며 새로 태어났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복학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아직은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날것의 사회를 더 겪어보고 싶었다.
곧장 카페를 찾지는 않았다. 머리가 너무 짧기도 했고, 때마침 누군가의 대타로 인쇄소에서 일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상 아르바이트라는 것은 소개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것도 경쟁이 치열한 자리였다고 했다. 운 좋게 얻은 인쇄소 근무는 야간부터 시작되어 아침에 해산하는 형태였으며, 조간신문과 이런저런 잡지(예를 들어 <대학내일> 같은 것)를 만드는 일이었다.
괴상한 형태의 기계들로부터 빠르게 종이에 텍스트가 박히고 나뉘고 합쳐졌다. 누구는 인쇄 공정을 관리하고, 누구는 생산품을 검수했다. 숙련된 기술과 경험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이는 위험한 작업은 오래 근무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몫이었다. 그 외에도 노란색 플라스틱 끈이 빠르게 사출되는 기계로 포장하는 작업이라든지, 기계의 타이밍에 맞춰 손을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든지(15년은 지난 기억이라 흐릿하다)…… 필요한 역할만큼 제법 많은 인원이 있었다. 종이가 흐르는 일정한 리듬의 기계음과 반복되는 작업에 졸음이 오기도 했다. 돈을 버는 새벽은 느리게 흘렀다.
나는 대타 기간이 끝난 뒤로는 다시 일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밤낮이 바뀐 것이나 몸을 사용하는 일은 제법 고통스러웠지만 이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예전에 경험한 택배 상하차 및 배달보다는 편한 일이었다. 일당은 후한 편이었고, 새벽에는 식사도 제공했고, 휴식시간도 있어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농담을 할 수도 있던, 나름의 인간적인 대우가 있던 일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내 머릿속에 울린 어떤 경고음 때문이었다. 다들 능숙하게 작업했지만, 조심성 없는 나는 기계가 가득한 이런 곳에서는 어쩌면 손가락이 ‘부러지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이런 경험이 나에게 방향을 제시했을 거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특히 두 번째의 직장에서 나는 인쇄소보다 훨씬 위험천만한 다양한 공장을 견학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역시 사무직으로 일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서 역시 조심성이 없어봤자 컵을 깨는 수준에서 그칠 것 같은, 그리고 어쩌면 로맨스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카페에서 일하기로 했다. 카페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 카페만을 골라서 문을 두드렸고, 다행히 금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처럼 조심성이나 균형 감각이 결여된 사람이 커피를 직접 서빙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다소의 결벽은 이것을 더욱 힘들게 했다. 주인 일당도 높은 기준을 추구하던 시대의 선구자였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내가 나르는 커피는 흘러넘치기 일쑤였다. 라테 아트가 망가지는 것은 마음이 아팠다. 그럴 때마다 컵을 교체하거나 새로 만들었다. 심할 때는 두 번 세 번이나 반복했다. 물론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내가 완벽히 통제 못 하는 재능이 요구되는 영역에서 계속 종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구자들의 사업 확장은 계속되었고, 오랜 기간 공사 중이었던 3층을 오픈했다(지옥의 시작이었다). 직원을 더 뽑게 되었고 그 타이밍에 맞춰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라테 아트가 구겨진 행주로 변하지 않게 하는 법, 가득찬 액체의 수평을 유지하는 법, 이것이 조심성의 문제인지 다른 영역인지 확실치 않다. 아무튼, 조심성의 부재라는 고약한 특성은 그 뒤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겠지. 그 뒤 언젠가 발목이 부러진 나는, 깁스를 한 채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4시간씩 걸리는 거리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것도 여러 번. 이 짓거리 때문에 발목이 제대로 고쳐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은 있었다(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실제로 덜 고쳐졌다). 물론 그런 것보다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신체의 불완전 상태와 호르몬의 과잉이 그것을 더 값진 것으로 느끼게 했는지, 우리 사랑의 드라마틱한 서사를 자아냈는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 확실치 않던 초읽기의 시절, 그 당시 발목의 시큰거림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시간이 다소 흘러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지에서 생긴, 조심성 없어서 얻은 무릎 언저리의 큰 흉터는 그녀만큼이나 지워지지 않고 있다.
2022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