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변곡점 09화

응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

그 자체로 그만인 사소한 훌륭함

by Rooney Kim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평소라면 9호선과 8호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날은 친형과 약속이 있어 건대입구로 가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7호선을 타니 청담 대교 아래를 흐르는 한강과 해 질 녘의 풍경이 굉장히 반갑게 느껴졌다. 7호선 라인을 따라 자취하던 시절에는 매일같이 타던 지하철과 매일 보던 풍경이라 너무 익숙해져 그 가치를 몰랐는데 거의 수년만에 보는 풍경은 잠시 동안 머리를 가볍게 비워주었다.


어느덧 지하철은 뚝섬유원지역에 도착했고 한강뷰는 사라졌지만 상쾌한 여운이 가슴에 남아 복잡한 내 머릿속 생각의 총량에 여유가 생겼다. 그런 기분 알지 않나, 뭐랄까 말랑말랑해진 감성으로 여유로워진 감정의 대역폭 덕분에 지나가다 누가 이유 없이 어깨빵을 아니, 부딪혀도 한 번쯤은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갈 정도로 관대해진 여유로움 말이다.


"이번 정차역은 건대입구, 건대입구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음..”


정차역 방송을 하던 기관사님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기고 방송 직후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양이 아나운서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직전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일은 금요일입니다. 이번 주말은 날씨가 괜찮은 편이라고 하네요. 코로나 때문에, 회사의 업무, 학교에서의 학업 때문에 다들 힘드시죠? 네, 쉬운 게 없습니다. 다들 힘드시겠지만 오늘 저녁은 아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퇴근길 되시고 저는 여러분들을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기관사님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승객들의 하루를 차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은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듯 여기저기로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이어폰을 빼고 방송을 듣기도 했다. 기관사님이 승하차 방송 시 위와 같은 특별 인사말을 전달하는 건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니다. 예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나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난 이런 방송이 나올 때마다 귀를 기울인다.



기관사님도 출퇴근 멘트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준비하는 메시지가 하루 일과에 지친 어떤 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인,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생각 말이다.


문을 내릴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관사님의 인사에 답할 수 있다면 감사하다는 마음을 큰 소리로 내어 알려드릴 텐데.’


하지만 그는 그런 인사를 바라고 방송을 하진 않으셨을 것이다. 기관사님의 방송은 한마디로 '응답 없는 대화'인 셈이다. 기관사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고, 아마도 나를 포함함 몇몇은 그 메시지에 감화되어 감사함을 느꼈을 테다. 답변은 없지만 누군가의 가슴은 따뜻해졌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우리 삶에는 응답이나 대답을 바라지 않으면서 기계처럼 묵묵히 수행하거나 혹은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인사에 대꾸도 않는 상사에게 인사하는 직원들,
인사에 대꾸도 않는 손님에게 항상 인사하는 아르바이트생들.
욕설에도 불구하고 상냥하고 정확하게 전화 응대하는 감정노동자,
무엇보다도, 버릇없고 감사할 줄도 모르면서 백날 바라는 것만 많은
‘우리'를 묵묵히 길러내신 부모님..


응답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이들 덕분에 사람들은 성장하고 사회는 굴러간다. 우리는 이들에게 한 번도 제대로 응답하거나 정식으로 감사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에 진정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부터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눈과 귀가 열리는 것’ 일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오늘 저녁 메시지를 전달해주신 기관사님은 내일도 역시 승객들에게 답변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관사님의 방송은 앞으로도 어쩌면 단 한 번의 응답이 없는 단방향 메시지가 되겠지만 그분은 이미 무수한 응답을 마음으로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관사님의 방송은 ‘감사합니다’하고 다가오는 답변을 기대하지 않고 ‘말랑말랑해진 마음을 품고 안전하게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승객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평생을 바쳐 자식을 키우면서도 그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사회에서 안전하게 자리 잡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sub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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