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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ney Kim Jul 25. 2021

백조의 계절은 모두 다르니까

다시 쓰는 안데르센, '미운 아기오리'


“꼭 지금이어야 해?”

경주는 떨리는 손을 겨우 부여잡고 최대한 평정을 유지한 채 말했어.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정희의 깊은 한숨뿐이었지.

“…응.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아.”

경주는 정희를 붙잡고 싶었지만 동시에 자신도 없었어. 번듯한 직장에라도 들어가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평생 널 책임질 테니 다시 생각해 봐’라며 호기라도 부렸겠지만 지금 경주의 입장은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거든.

“정희야, 그런데..”

“그만..”

경주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고 싶었지만 정희도 더 이상은 아니라는 듯 냉정하게 경주의 말을 잘라버렸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

경주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이유를 여유롭지 못한 자신의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집안의 풍비박산을 한번 겪은 경주는 고등학생 때부터 어떻게든 경제적인 기반을 꼭 마련해놓고 엄마에게 집을 사줄 것이라는, 그 나이에 힘든 일을 겪은 아이라면 열에 아홉은 마음먹을 법한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거든. 따라서, 학자금 대출은 물론, 면접을 보러 갈 차비도 빠듯한 경주에게 정희는 항상 2순위일 수밖에 없었지.

‘뚜뚜-‘

한참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둘 사이의 침묵을 깨고 전화가 왔어. 번호를 보아하니 최근에 면접을 본 곳 같았어.

‘왜 하필 지금..’

“정희야, 그럼 그냥 우리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면 안 될까?”

정희는 수초 간 말이 없었고 경주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지.

“아니, 오빠.. 이걸로 그만하자.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리고 오빠와 미래를 그려보면 오빠의 옆에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 보여.”

“그럼 내일 만나자. 내가, 내가 그리로 갈게. 응?..”

경주는 이미 확고한 이별을 직감했어. 정희의 마음은 이미 크게 기울었던 거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건 정희의 완고한 성격을 아는 경주가 모를 리 없었지.

“오빠, 잘 지내. 그래도 오빠는 뭐든 열심히 하고 글도 잘 쓰고 재주가 많잖아? 이런 얘기하는 마당에 이건 웃긴 얘기지만, 오빠는 잘될 거야.. 그냥 그럴 거 같아. 그럼 이만 안녕.”

경주는 정희의 마지막 목소리로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 그저 단 한 번만, 얼굴이라도 보고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바른 수순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순리대로 돌아가지는 않아. 깔끔한 이별이란 거의 없는 법이니까. 전화를 끊고 경주는 동네 놀이터를 열 바퀴 정도는 돌았을 거야. 그러다 그네에 앉아 허공을 응시한 채 짙어져 가는 밤의 어둠이 하늘을 진분홍에서 진보라빛으로 채색하는 시간 속에 빠져있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거든.

‘지이잉-‘

‘아, 면접 본 곳에서 전화가 왔었지.’

경주는 정희와 한창 통화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었다는 걸 이제야 생각해냈어. 그리고 방금 수신된 문자 메시지를 열어보았지.

‘안녕하세요? 신경주님, 이번 채용에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높은 역량에도 불구하고 이번 포지션 채용에서는 안타깝게도 귀하를..’

경주는 결국 또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어. 정희와의 이별로 이미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거의 합격할 것이라고 믿었던, 아니, 꼭 합격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지. 경주는 밤하늘이 거의 검게 물든 뒤에나 집으로 돌아갔어. 엄마는 TV를 보고 계셨고 형은 방에서 통화 중이었어.

“경주야, 밥은 먹었어?”

“네..”

경주는 사실 오늘 점심부터 한 끼도 먹지 않았지만, 그저 엄마를 안심시키고 밥을 차리는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밥을 먹었다고 했어. 창백해진 경주의 얼굴과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엄마도 무언가 눈치를 채시긴 했을 거야. 경주는 가방과 외투를 벗어놓고는 침대에 깊숙이 몸을 묻었어. 이불, 베개에 묻혀 포근함을 느끼는 이 순간만이 오로지 자신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지. 경주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그렇게 흐느껴 울다 자칫 엄마라도 들어오면 부끄러움은 고사하고 눈물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눈물이 쏙 들어가는 걸 느꼈어.

“경주야, 저녁 안 먹어도 되니? 엄마가 차려줄까? 고기랑 나물이랑 있어.”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누워있을게요.”

경주는 반쯤 닫힌 문 사이로 얼른 엄마에게 대답했어.

‘그러고 보면 엄마는 아빠랑 이혼하고도 참 용감하게 잘 살아오신 거잖아. 아빠도 그래.. 엄마에게 모든 걸 다 주시고 다시 일어나셔서 가게도 하시고 집도 사고.. 엄마, 아빠는 참 대단하신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경주는 문득 옆방에서 통화 중인 형의 목소리가 들렸어. 매사에 긍정적이고 당당하고 또 똑똑해서 어떤 문제든 쉽게 해결하는, 그야말로 부러운 형이었지.

‘형이랑 나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형은 또 어떻게 저 모든 걸 다 잘하지? 대기업에, 연애도 7년째야. 곧 결혼하는 거 아닌가 몰라.’

경주는 불현듯 집안에서 자신이 제일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어. 바보 같은 생각인 건 알지만 실연과 불합격 통지를 받은 지 1시간도 채 안된 사람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절망감이기도 하지.

‘지이잉-‘

친한 친구인 수종이의 전화였어. 받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경주는 이대로가 다간 더 우울한 생각만 들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어.

“뭐하냐? 밥 안 먹었으면 나와라. 지금 오랜만에 동기들 다 모이거든.”

“싫어.”

“어허, 그러지 말고 나와. 용상이랑 승철이도 왔어. 수민이랑 윤희도 있고. 아, 민상이도 곧 온대.”

수민이는 한 때 경주랑 CC였던 사이였어. 비록 1년 여의 만남 후 다시 친구가 되었지만 이후에 조금 어색했던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것도 이미 십여 년 전 일이야. 경주는 거의 일 년 만에 모이는 친구들을 보면 지금의 이 절망감이 조금이나마 해소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

“야, 신경주~ 우리 앞으로 이런 자리 이제 만들기 쉽지 않아. 다들 취업도 했고 민상이는 벌써 3년 차래. 와, 우리가 올해 서른 살인 거 실화냐? 더 늙기 전에 빨리 나와라. 난 너 나오는 걸로 알고 끊는다. 어여 와!”

‘뚜뚜-‘

경주는 어두운 방 안에서 끊긴 전화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어.

‘오늘 전화는 모두 하나같이 자기 얘기만 하네. 정희도 헤어지자고 통보하고, 회사도 불합격 일방 통지에, 수종이까지 어떻게 모두 다 지 말만 하냐.’

경주의 마음은 깊은 절망감으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렇게 방에 처박혀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어. 하지만, 이내, 우울할수록 바깥으로 나다니고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책 구절이 떠올랐고 경주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나갈 준비를 했어.

“얘, 방금 들어왔는데 또 어딜 가?”

“얘들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하고 들어온 거예요. 밥 먹고 들어올게요.”

“아까 밥 먹었다며?”

‘아차..’

“아니, 술, 술이요.”

“술도 잘 못 먹는 얘가..”

‘아 그렇지.”

“암튼 동기들이 오랜만에 모인대요. 잠깐 다녀올게요.”

“원래 약속 있었다면서?”

‘아 그렇게 말했지.. 나 왜 이러냐.’

“조심히 다녀와. 못 마시는 술 받지 말고, 알았지?”

“네.”


약속 장소에는 이미 민상이까지 다 나와있었어. 친구들은 경주를 반겼고 특히, 이미 거하게 술을 마신듯한 수민이가 경주를 아주 반겼어. 한때, 아니 아주 오래전에 연인이었던 사람과 다시 친구가 되는 건 정말 특이한 경험이라 경주도 수민이와 헤어진 후 어색해지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던 지난날이 떠올랐어.

“나, 볶음밥 하나만 주문해도 돼?”

경주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꽉 막혀있던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어. 실연으로 짓눌렸던 마음도 조금 누그러드는 느낌마저 들었지. 어쩌면 자신의 과하게 반기는 수민이의 행동이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들었어.

“야야, 잠깐, 조용히 해봐. 오늘 수민이가 할 말이 있대.”

수종이의 한 마디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곧 그녀의 입으로 집중되었어.

“나, 올 연말에.. 결혼해.”

순간 분위기는 엄청 달아올랐어. 분위기를 보아하는 윤희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고 다른 남자애들은 처음들은 듯 저마다 축하한다고 난리였어. 경주도 과한 리액션으로 수민이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등 축하를 아끼지 않았어. 하지만 그의 마음은 다시 한번 지하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 꽤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어. 왜냐하면, 1분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의 세련된 모습과 그녀의 반김에 어쩌면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오늘의 실연을 잊을 수 있을까라며 착각했던 자신의 부끄러움과 다시 깊어진 절망감은 얼른 샤워호스로 씻어 내리고 싶을 정도였거든.

“남친은 어떤 사람이야? 동갑이야? 어디 다녀? 어디 살아?”

주변에서 하는 첫 결혼이라 그런지 친구들은 궁금한 게 많아 보였어.

“서른두 살이고 삼성 다녀 그리고 집은 청담이고. 그런데 자취해서 지금은 서초동 빌라에 전세로 있대.”

그야말로 놀라운 스펙이었어. 대기업에 강남 본가라니 친구들도 큰 소리로 놀라며 축하했지만 아마 속으로는 다들 자신의 처지와 이를 비교하며 저마다의 절망감을 맛봤을지도 몰라. 윤희가 특히 부러워했지만 수민이 성격 상 남친의 친구들을 소개해 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지.

“민상아, 너도 외항사 합격했다며. 이야, 대단하다. 2년 만인가?”

“응, 고마워. 내가 2년 넘게 중소기업 다니면서 진짜 힘들게 준비한 거야. 후우, 이제 속이 좀 후련하네.”

“그럼 언제 나가?”

“하반기에 짐 싸서 가야지. 이제 세계 여행이나 하면서 일해야지. 하하.”

“대단하다. 중동으로 가는 거야? 거긴 연봉은 얼마나 주냐?”

용상이가 묻자. 민상이는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곧네 말했어.

“완전 신입으로 가는 거라 5천 정도야. 체제비 잘 모으면 거의 6천 된다고는 하더라.”

“우와- 신입인데 그 정도야?”

용상이와 수종이가 소리를 지르며 부러워했어. 오늘 경주가 불합격한 중견기업은 초봉이 3천 후반 대였는데 경주는 그것도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경주는 그마저도 떨어졌는데 민상이는 초봉 5천에도 놀라는 기색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며 경주는 친구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사소한 괴리감에 슬슬 다시 우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야, 용상이 너도 지금 2년 차에 5천이라며, 뭘 놀라냐.”

‘뭐? 용상이가 그렇게 많이 받아?’

“아니야, 그래, 난 그 정도 받는데 승철이가 짱이야. 승철이 스타트업이잖아. 얘는 연봉 말고 스톡옵션으로 벌써 1억 받았대.”

그러자 친구들은 다시 승철이를 보며 부러움 반, 놀라움 반으로 소리를 질러댔어. 경주는 이런 게 ‘어른의 모임’이고 ‘어른의 경쟁’ 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

“윤희는, 야야, 윤희 넌 그 오빠는? 주택공사 다니는 오빠?”

“아몰라, 우리 싸우고 안 본 지 2주째야. 난 수민이 소개팅만 기다릴래.”

친구들은 대학생 때와 다름없는 윤희의 돌직구 섞인 한마디에 다들 한바탕 웃었어. 분위기는 어느새 각자 근황을 소개 아니, 은근히 자랑하는 자리로 바뀌었지. 그리고 경주는 갑자기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어.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서로 높낮이를 모른 채 그저 비슷한 동질감과 다 함께 웃고 우는 끈끈함에 세상 든든하고 부담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졌지. 어쩌면 그 무엇 하나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는 현실에 초라해진 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어. 그리고 이제 수종이 마저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면 자기는 도대체 뭘 내세워서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야 할지 엄청난 고민에 빠져버렸어.

“아참, 수종이가 대박이야. 어쩌면 제일 대박일걸?”

경주의 이런 마음을 알리 없는 민상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어.

“뭔데, 뭔데? 야, 박수종, 너도 결혼하냐?”

“아냐, 수종이 얘네 집, 공장 하잖아. 얘 지금 벌써 이사야. 아빠는 대표이사고.”

“뭐?! 야, 우리는 모두 사원인데 네까짓 게 이사야?”

“그게 다가 아냐, 수종이 작년 말에 아파트도 샀는데 어디였지? 강남? 벌써 3억이 올랐데.”

친구들은 다들 수종이의 근황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어. 직장과 집을 모두 해결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친구들은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수종이를 보면서 놀리기도 했지만 다들 부러워하는 게 보였어. 수년 전만 해도 학교에서 술 마시고 학과실 소파에서 퍼질러 자던 모습을 본 사이라 그런지 누구는 기업의 이사고, 누구는 대기업을 다니고, 또 누구는 벌써 결혼을 한다는 현실이 차마 인정하기 싫을 만큼 낯설어진 거지. 분명, 친한 친구들이고 또 성격들도 좋아 다 같이 허물없이 지낸 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오늘만큼은 그동안 경주가 알던 친구들이 아니었어. 마치, 자신은 바닥에 앉아있는데 누구는 3층에 있고, 누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을 지나고 있고, 또 누구는 목을 꺾어야 그 끝이 보이는 높은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자신과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 거야. 경주는 그런 사실이 좋지는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어. 세상은, 아니, 지금 이 동기모임에서만 봐도, 모두 잘 나가고 행복한데, 자신만 뒤쳐졌다는 걸 인정하는 건 겸손이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야.


경주는 제발 자신의 근황은 묻지 않길 바랐어. 가뜩이나 휴학으로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취업을 준비했는데 중소기업을 다니다 나와서 다시 재취업을 준비 중이고 그마저도 연봉 3천 후반의 회사 면접에서 떨어지고,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경주야, 넌 요즘 어떻게 지내?”

마침내 수종이의 입에서 경주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한마디가 흘러나왔어. 경주는 마치 면접이라도 보는 듯 온몸이 긴장됐고 유창하던 평소의 언변은 온대 간대 없이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맞아~ 경주야, 나도 궁금했어. 넌 어떻게 지내? 여친이랑은 아직 만나?”

수종이의 질문에 수민이가 거들자 이제 친구들은 모두 경주만 바라봤어. 경주는 갑자기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어. 다들 잘 나가는데 나만 별로면 어쩌면 다들 속으로 더 안도하지 않을까.

“나, 오늘 면접 불합격 통보받았어.”

그러자 다들 애써 웃으며 경주를 위로하기 시작했어. 경주 같은 성격이면 다른 데서 곳 좋은 소식이 올 거라는 막연한 한마디도 들렸지.

“그리고 나 오늘 차였어.”

원아웃에는 위로하던 친구들이 투아웃이 되자 마치 왁자지껄하며 내달리던 게임이 급하게 종료된 것마냥 상승기류를 타던 분위기가 마치 고기압 전선을 만나 급속히 하강하는 분위기에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지.

“우리 학교 다닐 때 성적은 그래도 경주가 제일 좋았잖아. 곧 잘될 거야.”

하강기류를 눈치챈 수종이가 급히 한마디를 거들며 다시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했어. 그러자 친구들도 뭘 그런 걸로 그러냐며 다들 한 마디씩 위로를 건냈어. 승철이는 자기도 한 때 열 번 도 넘게 면접에서 떨어져서 힘들었다고 했고, 민상이도 3년째 중소기업을 다녔으니, 눈을 조금만 낮추면 된다고 했어. 엄청 소리를 지르며 경주를 반겼던 수민이도 곧 좋은 사람 다시 만나면 된다고, 자기도 결혼하지 않냐며 위로를 해주었지. 하지만 한 번 처진 분위기는 다시 살리기 어려웠어.


곧 윤희는 2주간 연락이 없던 남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며 받으러 나갔고, 수민이는 예비신랑이랑 카톡에 열중하기 시작했어. 용상이과 승철이는 어느 스타트업이 전망이 있고, 스톡옵션을 받으려면 어떤 기업에 가야 하는지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수종이와 민상이는 잠깐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면 자리를 비웠어. 5분 전까지 그 좋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치,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 경주는 한때, 친구들과 자신은 모두 다 같은 비슷한 처지라 서로 의지하고 장난치며 학교를 졸업해도 아주 오랫동안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막상 각자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보니 다들 크고 화려한 날개를 펴고 날아갈 준비를 마쳤는데, 자신만 아직 물에서 조차 텀벙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못난이처럼 여겨진 거야.


어색해진 기분을 느낀 경주는 화장실에라도 갈까 하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어. 문득, 오늘 실연당했다는 사실과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는 현실이 다시 경주의 마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어.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부끄러웠던 현실은 어쩌면 그냥 이겨낼 수 있었어. 비교로 인한 부족함은 사실, 한동안 친구들을 안 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실연과 불합격은 말 그대로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였던 거지. 다시 자리로 돌아가던 경주는 각자 현실에 푹 빠져 사는 친구들을 보며 자신도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어. 경주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지. 2만 원.. 수중에 그가 가진 전 재산 2만 원을 꺼내 아직 담배를 피우고 있는 수종이와 민상이에게 건네줬어.

“나 먼저 갈게.”

“어, 왜? 우리 2차 갈 건데. 치킨 뜯어야지?”

“나 오늘 일진이 별로잖아. 그리고 엄마가 오늘은 빨리 들어오래. 자, 여기.”

경주는 2만 원을 내밀었고, 수종이는 오늘 이 자리는 자기가 쏘는 거라며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지. 하지만 경주는 2만 원이라도 주지 않으면 너무나도 짙어진 패배감에 다시는 친구들의 얼굴을 볼 자신조차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어.

“아니, 내가 쏘는 거라고. 하하, 야, 너 취했구나. 그냥 가도 돼.”

한사코 거절하는 수종이를 보다 못해 민상이가 경주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잽싸게 2만 원을 받은 뒤 경주에게 살갑게 인사했어.

“경주야, 나중에 또 보자. 잘 될 거야. 힘내!”

경주는 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어. 그리고나자 온 정신이 멍하니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지. 길을 걷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갈 뿐이었고 이렇게 가다가는 도저히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서 이어폰을 꽂고 아무 노래나 틀었어.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수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거위의 꿈 중에서


경주는 어느새 다시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있었어. 마치 자신의 사연 같은 노래를 들으며 막막한 현실에 감정은 고조되고 있었고, 그저 한숨만 내쉬고 있었는데 문자가 하나 와 있었어. 엄마였지.


‘경주야, 너무 늦지 말고 조심히 들어와. 혹시 밥 안 먹었으면 집에 와서 먹어. 밥 다시 해놨어. 그리고 괜찮아. 뭐든 다시 하면 되니까. 또 해봐.’


경주는 그동안 억지로 꾹꾹 참고 눌러왔던 울음이 한 번에 터지고 말았어. 그 슬픔은 오늘 헤어진 정희에 대한 감정도, 풀리지 않는 취업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도 아니었어. 서른에 접어들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는 현실을 모두 숨겼지만,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엄마의 한마디 때문이었지. 집 한 채 사주겠다던 십 대의 포부는 어디로 가고, 자신의 앞가림조차 쉽사리 해결 안 되는 현실은, 그 시절에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의 미래였거든. 그렇게 경주는 그네에 앉아 숨죽여 울고 있었고 속절없는 밤은 점점 더 짙어져 갔어. 별은 반짝이고 있었고 희뿌연 구름 아래로 한 무리의 기러기들이 제갈 길 가느라 멀리 날아가고 있었어.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wild-g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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