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던 것의 발견
“수아씨,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수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갸웃한 채로 그저 정민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런 수아의 모습을 보니 정민은 문득 한 달 전 헬스장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지.
‘그땐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내가 정말 죽었다니.’
그런데 정민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진 마음이 들면서 마치 어느 따스한 봄날, 푸른 잔디 위 쏟아지는 햇살 아래 누워 봄의 일광 폭포가 쏟아지는 가운데 포근한 이불속에 있는 듯 평화로운 상태가 된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묘한 기분이 들었어.
“전 준비됐습니다. 가족들과도 모두 만났고 평생을 살면서 몰랐던 가족들의 고민, 문제도 모두 해결했구요. 기분이 묘하네요. 뭐랄까.. 가족의 일원이었지만 20년도 넘게 각각의 속내를 몰랐던 지난날보다 가족 하나하나와 모두 속 깊은 대화를 하고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함께 헤쳐나간 이 한 달 동안 더욱 진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어요. 하하.. 이거참, 죽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이겠지만, 진작 이런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네, 말씀하세요.”
“하지만 이제 여한은 없어요. 전, 우주로 가겠습니다. 환생도 엄청나게 했었다고 하니 이젠 영혼도 좀 쉬게 해 줘야죠?”
정민은 그동안 그토록 고민했던 결정을 내렸어. 더 이상 환생하지 않고 우주로 나가보기로 한 거야.
“음..”
그런데 단번에 정민의 대답에 따라 당장 그를 우주로 보내줄 줄 알았던 수아는 뭔가 망설이는 듯 예상치 못한 말로 입을 열었어.
“정민님.”
“…네?”
“정민님, 생명이 연장되었어요. 한 달 동안 쌓은 덕이 이번 영혼의 성장을 이끌어낸 것 같아요.”
수아의 대답을 들은 정민은 한 달 전 자신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동그래져있었어.
“… 아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저도 결정의 명확한 이유는 잘 몰라요. 물론, 정민님이 지난 한 달간 한 행위들은 저 역시 수백 년 만에 처음 본 놀라운 광경이긴 했어요.”
정민은 여전히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어. 아니, 그냥 믿기 힘들었던 것 같아.
“보통, 한 달의 시간을 주면 도망치고 숨기 바쁘거든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이나 남을 해코지하고 하구요. 그런데 정민님은 정말 달랐어요. 아마도 그래도 생명이 갑자기 연장된 것 같아요.”
“그럼.. 제가 다시 살아나는 건가요..? 전.. 그런데 이미 장례도 치르고.. 그럼 얼마나 더 사는 건 가요..?”
“에이, 그건 깨어나 보면 알아요. 그리고 수명은.. 음, 아마 정민님이 원하는 나이만큼은 큰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
정민은 혼란스러웠어. 이미 죽음이라는 거대한 관문에 대한 마음도 모두 정리했고 가족들과도 꿈을 통해 하나하나 모두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 마당에 깨어난다니, 그것도 이미 장례를 치른 지 한 달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뭘 어떻게 자신을 환생시켜준다는 것인지 너무 복잡하고 황당하기도 했던 거야. 물론, 싫진 않았지.
“수아씨, 그럼, 제 몸은 요? 제 몸은 이미 화장을 해서 저기 납골당에..”
“정민님,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제 제가 셋을 셀 거예요. 셋을 센 뒤에 눈을 한 번 오래 꼭 감았다 뜨세요.”
“잠깐! 잠깐만요.. 그럼 저 다시 돌아가는 건가요? 가족들의 고민들은 다 해결된 게 맞나요??”
“셋, 둘, 하나. 정민님, 그럼 나중에 또 만나요. 안녕.”
수아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정민은 홀로 새하얀 공간에 남아있었어.
‘정말 사라졌어. 나 정말 다시 환생하는 거야?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거야..?”
정민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수아씨의 말대로 눈을 한 번 꼭 감아보기로 했어. 밑져야 본전이고 복잡한 무언가는 모두 그들이 해결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어. 십여 초가 지났을까. 정민은 살며시 눈을 떴지. 그러자 온통 하얗던 세상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한 순간에 밤이라도 된 듯 까만 공간으로 가득 찬 곳으로 변해있었어.
‘여기.. 여기야말로 죽음의 공간인가..?’
그때 멀리서 ‘삐- 삐-‘ 거리는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어. 마치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열차처럼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지.
“혀.. 형, 정민이 형! 엄마, 누나, 형이, 형이 움직여요..! 엄마.”
정민의 귓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어. 몇 년간 전혀 듣지 못했던 동생 정환이의 다급한 목소리였지. 이내 정환은 눈을 떴어. 세상이 온통 까맣게 변했다고 생각했던 건 눈을 뜨지 못하고 한 달간이나 의식을 잃고 있다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오면서 눈을 감고 누워있는 자신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던 거야.
“후우우- 하아아아아-“
정민은 두 눈을 뜨고 거추장스러운 산소호흡기를 떼어내고 크게 심호흡을 했어. 마치 쪼그라져있던 폐가 풍선처럼 부푸는 것처럼 느껴졌지. 잠자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신경이 하나하나 느껴졌고 감전된 것 마냥 몸을 간지럽히는 지릿거림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듯했어.
‘살아.. 난 거야? 나 정말 다시 환생한 건가?’
정민은 지난 한 달간 가족들의 꿈과 정도령의 집을 오가며 한 모든 일들을 떠올렸어. 이내, 비록 그 모든 것이 꿈 속이었지만 모든 일은 생생했고 정말 일어난 일이었다는 걸 확신했지. 정민이 그렇게 정신을 차리는 동안 엄마, 누나, 정환은 물론, 아빠와 아빠 친구들까지 병실로 뛰어들어왔어. 병원에서 가장 좋은 VIP룸이었다 보니 넓어도 모두가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정민아, 정민아..!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정민아.. 깨어났구나.”
엄마의 울음은 마치 감기가 전염되듯 삽시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어. 정민은 그 와중에 가족들은 그렇다 쳐도 아빠 친구들인 아저씨들까지 눈물을 흘리는 건 좀 오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정민아,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다시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모든 가족들이 저마다 정민에게 한 마디씩 건네었어. 정환은 정민이 옆에 딱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지.
“그.. 그럼, 한 달 동안, 그러니까 제가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꿈에서 만난 거.. 모두 기억나세요..?”
정민은 너무나 궁금한 마음에 아예 직접 물어보기로 했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지.
“정민아, 네 덕분에 우리 모두가 살았어. 모든 걱정과 문제를 네가 다 해결해주었단다. 게다가 너무나도 과분하게도..”
철민 아저씨가 말을 하는 도중 아빠가 이제 더 얘기 안 해도 된다는 듯 말을 끊었어.
“정민아, 너도 다 기억나지? 우리 가족과 아빠 친구들한테까지 너무나 큰 도움을 준거 말이야.”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어. 사실, 정민은 그 모든 게 그저 꿈속의 일일까 봐 그게 너무 걱정됐던 거야.
“다 잘됐어. 다 해결됐고. 이제 너까지 깨어났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그렇게 가족들은 정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나누며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정민은 그런 모습을 보며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그제야 실감하고 있었지. 그때, VIP룸의 입구에 누군가 서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보였어. 처음엔 간호사인 줄 알았지만 곧 누군지 알게 되었지.
‘수아씨..?!’
그러자 수아는 싱긋 웃고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곤 ‘쉿’하며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한 뒤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어. 정민은 곧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고 곧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와서 정민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어. 가족들은 저녁을 어디로 가서 먹을지, 가족 여행은 어디로 갈지 저마다 하고 싶은 일들을 말하다보니 병실 안은 금세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해있었어. 정민은 혼자 웃으며 가족들을 지긋이 바라보았어. 같이 저녁을 뭘 먹을지 고민하고 뭐하며 시간을 보낼지 저마다 투닥거리며 의견을 내는 이런 보통의 나날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거야. 그때 정환이 갑자기 휴대폰을 내밀어 정민에게 보여주었어. 기쁨에 겨우 조금 흥분한 모습이 사뭇 귀여워 보였지.
“형, 이것 봐. 난 형 말대로 코인 일부를 여기저기 보내기만 했는데 형 재산은 오히려 더 늘었어.”
“그래? 얼만데?”
정민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래소 앱과 자신의 개인 지갑을 확인했어.
‘서정민. 현재 밸런스 3,300억 원’
분명, 여기저기 돈을 보내느라 수백억 원은 더 썼는데 거래계좌에는 오히려 자신이 죽었을 때보다 800억 원이 더 늘어나 있었던 거야. 정민 역시 깜짝 놀라 정환을 바라보았고 정환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가족들끼리 서로 저녁 메뉴와 여행 갈 곳을 정하느라 화목하게 투닥거리는 소리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오랜만에 엄청난 금액의 자기 재산을 본 정민은 순식간에 또 다른 행복감이 자신의 기분을 지배하는 걸 느꼈어. 행복의 기준과 조건은 너무도 다양하기에 꼭 어느 하나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지.
“정환아.”
“응, 형.”
“거기서 300억은 너 가져.”
“응..?”
정환은 갑작스러운 형의 대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어. 정환은 정민의 재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거든.
“쉿, 엄마, 아빠, 누나는 내가 알아서 줄 거니까. 넌 우선 300억 챙겨. 너 그렇다고 대학교에 안 간다고 하면 혼난다. 알겠지?”
정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정민은 누가 볼세라 얼른 휴대폰을 끄고는 가족들의 대화에 끼어들었어.
“내가 오늘 한 달만에 깨어났으니까. 오늘 저녁은 제가 먹고 싶은 걸로 먹어요. 소고기 어때요? 소고기랑 된장찌개? 특수 부위 먹어요. 나 돈 많아요.”
VIP 병실은 저마다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느라 시끄러운 정민이네 가족들의 화목한 소리로 가득 찼어.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었지. 행복은 여유에서 나오는 건지, 여유가 행복을 만들어주는 건지. 여전히 정답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누구도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서로를 먼저 생각하니 행복해질 수 있다고 느꼈어. 정민은 그렇게 죽음을 통해 행복의 조건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거야.
더 이상,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배려가 우선인지 돈이 먼저인지. 그런 철학적인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어. 중요한 건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노력은 사실 고통스럽다는 거였어. 그리고 대개 그런 고통 없이 얻어진 결실은 이미 썩어있거나 곧 사람들을 중독시킨다는 것도 깨달았지.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견디는 고통은 어쨌거나 건강한 결과로 이어지고 이는 건강한 행복을 낳는 기반이 될 테니까 말이야.
응? 코인으로 한탕 크게 벌어들인 정민은 좀 다르지 않냐고? 하하. 좀 과장된 복이긴 하지만 정민은 그런 대운을 받아들일 인성이 준비되어있었어. 그리고 이후에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봤잖아? 자신을 도와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는지 느꼈다면 이제 우리도 이런 철학적인 질문에 고민하기보단 자신의 현실을 이겨내고 주어진 것들로 서로 배려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언젠가 주어질 자신만의 대운의 시기에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하고 이를 이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젊은 억만장자의 죽음’ 끝
끝까지 완독해주신 소수의 분들 너무나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는 '젊은 억만장자의 죽음' 후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