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초한 초여름 대낮, 하늘의 조각구름은 계절을 위시한 액세서리 마냥 점점 따가워지는 여름의 햇살을 막기는커녕 애꿎은 들판이나 산에만 그늘을 드리운 채, 무수히 샘솟는 내 마음을, 뿜어져 나오는 족족 뜨겁게 말려버렸다.
그땐 그랬다.
그땐, 내 짧은 삶 중, 가장 어렸고, 가장 선명한 얼굴을 한, 내가 가장 돋보이는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디서 불쑥 튀어나온 강아지풀 같은 자신감으로 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이는 곧 어느 들판 이름 모를 풀잎, 쭉정이 마냥 뚝하고 꺾여 길가 아무 데나 버려지곤 했다.
부끄러웠지만 감정은 쉽사리 여과되었고 곧 다시 자라난 자신감은, 나를 마치 여름날 하루아침만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부추겨주더니 기어이 너의 얼굴에 의미 있는 웃음을 짓게 만들고야 말았다.
너
나는 그랬다.
마냥 어린 게 행복하지만은 않구나. 나는 나의 의견을 내세우고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이 이토록 험난한 모험의 여정이었다면 그저 나 홀로 지내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한 아직은 유약한 아이에 불과했다.
그땐, 내 짧은 삶 중, 가장 어리석고, 가장 불투명한 표정을 한 채, 나 조차도 내 마음을 읽기 가장 어려운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였을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친구들이 불편했고, 내 감정을 해치는 것은, 그게 꽃이든, 편지든, 선물이든 주는 이의 고운 마음과는 달리 내 감정에 생채기만 남길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순수한 덕분이었을까. 마음속 상처는 초여름 햇살에 굳어갔고 통증은 점점 잦아들었다. 저 멀리 하늘 높이 솟은 뭉게구름이 어느새 무수히 많은 비구름을 불러왔고, 그즈음 상처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우리
기껏해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이백 여 미터, 딱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 사실, 별 얘기도 없었다. 내가 조잘조잘 떠들면 넌 가끔 얼굴을 돌려 웃어줄 뿐이었다. 내가 살짝 웃으면 너는 더욱 신이 나 별거 없는 이야기를 더 과장해서 늘어놓을 뿐이었다.
내가 다가가던, 내가 밀어내던 시간이 그저 한 공간에 겹쳐져 서로 다른 두 감정들이 만날 때 느낄 수 있는 밀도의 차이와 기압의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나의 웃음이고, 너의 신이 난 마음이라는 게 세상 그 어떤 선물보다 더 크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공기 같던 시간이 옅은 지층처럼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그건 비바람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매번 말씀하시던 비 냄새가 나는 바람이, 닿을 듯 말 듯 머뭇대는 우리의 손 사이를 스치기 무섭게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누가 말릴세라 네 손을 잡고 뛰었고, 움켜쥔 네 손안에 난, 또 네 손을 감싸 쥐었다. 세차게 내리는 초여름 소나기는 도통 그칠 생각이 없었고 우리는 결국 근처 빌딩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쏴- 하고 내리는 비에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 비를 피하기 바빴다. 우리는 그런 모습에 한참을 웃었다. 다시 신이 난 나는 계속해서 너에게 뭐라 뭐라 신나는 이야기를 해댔지만, 잘 모르겠다, 네가 내 마음을 잘 들었는지. 세찬 소나기는 계속해서 내리며 청량한 빗소리가 내 마음을 때리는 통에, 잘 몰랐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나 신이 나서 하는지.
그런데 난 오히려, 쏟아진 소나기가 고마울 뿐이었다. 소나기가 아니었으면, 이제는 더 커진 내 마음이 네가 동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네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니.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이야기의 내용은 이제 알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소나기는 잦아들었고 말끔한 하늘이 청량한 빛깔로 다시 우리를 도로 밝히던 그날,
그날 알았다.
소나기에 꼭 쥔 두 손은 비가 그친 후에도 풀어지지 않았고, 너도, 나도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가 없음에도 얼굴에 한가득 웃음이 담긴 채 한참을 걸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