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따스한 손길로만
모르겠다.
사회란 것이 이토록 복잡하고 어지럽고 어려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뻔했다. 아니, 어쩔 땐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나온 이유에 대한 불쾌한 의문이 들어 끝없는 망상이 나를 심연의 어둠이 삼키는 내 작은 방구석의 가장 까만 곳으로 끌고 가 동이 틀 때까지 흔들어 놓곤 한다.
왜 그럴까.
가진 것 하나 없고 시기할만한 구석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내게, 그들은 도대체 뭘 얻길래 이토록 부지런히 쉴 틈 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삼오오 끼리끼리 똘똘 뭉쳐 한 팀이 되었을까. 만약 너희들이 치열하고 끔찍한 전쟁통에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었다면, 우습지만, 승리에 대한 나의 기도와 기부금은 모두 너희들 것이었겠지.
우습게도
나의 웃음에 한 모금, 나의 발걸음에 두 모금, 꿀떡꿀떡 삼킨 네 역겨운 목구멍으로 넘어간 나의 평범하게 평화롭던 면면은 어느새 거짓으로 점철된 더러운 문장이 되어 썩은 내가 진동하는 네 입과 손을 빠져나갔고,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너의 고약한 소설은 어느새 나의 지독한 현실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수모와 핍박에도 버틴 내 속을 더 문드러지게 만드는게 있다면, 저치들에 의해 누렇게 얼룩진 내 옷과 팔뚝과 정강이에 아린 멍을 보며 아무런 의심 없이 내게 손가락질하던 ‘사람 1’과 어느새 곁눈질로 슬금슬금 피하던 ‘사람 2’였다.
참, 우습게도 난 ‘사람 2’를 좋아했었는데 말이다.
너는, 너희들은 나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아 그토록 놀라운 단합과 실행력을 보여주는 걸까. 정말 나의 말이, 행동이 아니, 그저 발걸음이 보기 싫은 걸까, 어쩌면 그냥 나의 존재자체가 불편한 걸까.
지금 내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은 어제 네가 남긴 상처 때문이 아니다. 곧 또다시 재현될, 어쩌면 상상도 못 한 뜬금없는 이유와 억측으로 난무할 나의 다음 날과 너의 잔혹한 웃음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한 사람의 불행이 여러 사람의 행복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량적인 관점에서는 더 나은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까지 닿는다. 어쩌면 나하나만 희생하면 이런 일들은 조그만 사회면에도 실리지 않고 조용히 끝나버릴 사소한 사건 정도로 결론지어지지 않을까.
오랜 시간 동안 멍청한 것들에게 두들겨 맞다 보면 이토록 더 멍청한 생각에 닿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마음이 든다. 오만방자한 저치들을 언제까지나 저렇게 태평하게 두고 싶진 않다. 까만 방 한가운데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헤쳐나갈 방법을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 이런 날엔 더 이상 아플 머리도, 흐를 눈물도 없이 멍한 상태가 되어 그저 세상의 가장 까만 곳으로 기어들어가, 다시는 세상의 밝은 빛을 보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영원히 포근한 잠에 빠져들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할 뿐이다.
“쟤 잠들었니?”
“진작에 방에 들어갔으니 자고 있을걸요?”
“한동안은 잘 자는가 싶더니. 어째, 요즘은 새벽마다 계속 부스럭거리던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니?”
“그러게요. 이부자리라도 좀 봐줘야 하나.”
분명 나는 잠에 들지 않았다. 이들의 대화가 꿈속의 것인지, 현실인지 정도는 구분할 정도로 내 정신은 명료했고, 그저 걱정과 잡념의 그늘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깊은 밤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많이 지쳤지? 원래 그래, 사회란 게 그렇단다. 학교든, 직장이든 모든 사람들이 네 맘 같지 않지. 네가 아무리 애써도 널 밀어내기도 하고 어쩔 땐 멀쩡히 가만히 있는 널 무너뜨리려 생업도 내려놓고 달려들기도 하지.”
“오래 버텼어. 잘 버텼고, 조금만 더 해봐. 정 안되면 내게 오렴. 거봐,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잠들면 얼마나 좋아.”
새벽의 신비로운 심연은 종종 이것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현실 같은 꿈인지 조차 몰라, 그토록 나를 달달 볶으며 괴롭히던 어제의 기억도 그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날 초연하게 만든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에 내려앉았고, 이내 따뜻한 온기가 내 머리칼을 감싸 부드럽게 넘기며 어루만져 주었다. 그 손바닥은 마치 수십 년의 삶의 흔적이 굳은살처럼 박혀 거칠어졌음에도 내 머리에 닿자마자 마치 윤기를 얻은 듯 머리칼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갔다.
이 손길에 흐느낌도 없이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를 까맣게 탄 마음이 더 새까만 심연의 정중앙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한동안 들썩임도 없이 많은 울음을 쏟아냈다. 모르겠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 어느 시점부터 꿈인지 현실인지 이를 알아채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그저 무릎 위 따스한 품과 말없이 스르르 내 머리칼을 넘겨주던 그 손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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