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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Sep 30. 2021

꿈의 직장에서 해고당하다

7번의 퇴사와 3번의 해고

 <(나의)노동의 미래> #01



‘우리 회사에는 네가 일할 자리가 없어’


32살 정규직이 된지 막 6개월이 되었을 때 생애 최초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내 첫 직장은 종이 잡지를 발행하는 콘텐츠 기업인 가야미디어로 당시 남성지 <에스콰이어>나 패션지 <하퍼스바자>와 같은 유명 라이선스지(외국 잡지와 판권 계약을 맺고 한국판으로 발행하는 것)를 발행했다. 나는 <에스콰이어>의 피처 에디터였고 인턴 딱지를 떼고 정식 에디터가 된 지 갓 6개월 째였다.



신입 에디터로 꽃길을 꿈꾸며 일했던 나와는 달리 회사의 미래는 암울했다. 내가 정식 에디터가 되기 전부터 이미 <에스콰이어>와 <하퍼스바자>가 현 JTBC PLUS인 중앙 콘텐트리로 넘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에스콰이어> <하퍼스바자>한국판은 올해로 각각 26주년, 25주년이 된 잡지로 모태는 미국의 허스트 매거진이다. 허스트 매거진은 당시 오랜 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미디어와 라이선스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을 앞두고 있었고 이를 두고 온갖 루머들이 나돌았다.



‘1년간 계약을 연장하기로 했다’

‘이미 넘어가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모든 에디터를 데려가진 않을 것이다’

‘데려갈 에디터 리스트가 있다’ 등등  



이런 말도 있었다. ‘원래 월급 적고 힘없는 막내들은 안 잘려’ 반면에 이미 넘어간 다른 매체는 막내 2명이 해고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어느 것 하나 예측할 수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배당된 기사를 만드는데 집중했다.  



온갖 루머와 함께 피 튀기는 사내 정치가 난무했다. 사내 정치가 난무한들 힘없고 줄 없는 신입 에디터에게 무슨 소용이람. 매체가 넘어가든 넘어가지 않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선배들 말 잘 듣는 것 말고는 없었다.



계약은 연장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매체가 넘어가기 두 달 정도 전 에디터들은 제이 콘텐트리로 면접을 보러 갔다. 잘 차려 입고 가라는 편집장님의 말에 한남동 비이커에서 생애 처음으로 50만 원이 넘는 재킷을 샀다. 월급 190만 원 중 1/4이 넘는 금액이었다.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7개월 할부요..’ 앞으로 계속 일할 테니 갚으면 될 것이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면접 질문은 대충 이런 거였다. ‘종이 잡지가 디지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요?’ 2016년만 해도 디지털 매체로 인한 인쇄 매체의 위기감이 심각했던 터라 모든 종이 잡지가 디지털 플랫폼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였다. 글’ 뽕’에 차 있던 신입 피처 에디터인 나는 ‘이럴 때일수록 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진짜 에디터 리스트가 전달됐다. 그리고 그 속에 내 이름은 없었다. ‘너는 될 거야’라고 호언장담하던 편집장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처럼 못 가게 된 몇 명의 에디터들과 자발적으로 가지 않는 것을 선택한 에디터들, 그리고 곧 거대 미디어 그룹으로의 이직이 확정된 몇 명의 에디터들이 얼마간 한 사무실에서 일했다. 한 선배는 이것을 ‘침몰하는 배’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나는 그냥 여기가 초상집인가 싶었다.



곧 회사의 이사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선 이야기했다. ‘우리 회사에는 네가 일할 자리가 없어’라고. 그때까지는 <에스콰이어>가 넘어가도 나는 가야미디어에 잔류하여 회사 내 다른 매체에서 에디터로 일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아실현이나 꿈같은 건 둘째 치더라도 생계는 연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해고 통보를 받는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카드값이었다. ‘7개월 할부는 어떡하라고’. 그리고선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두고 이사는 자리를 떴다.



나보다 6개월 먼저 에디터를 단 선배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몇 개월 뒤 들은 소식으로는 그는 이에 불복하여 ‘책상’을 빼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회사가 나가라면 그저 나가야 하는 줄 알았다. 위로금이랍시고 챙겨 준 한 달치 월급에는 ‘아니 세상에 이렇게 큰 금액을 저에게 주시다니요. 저는 실업급여도 받을 건데요’라며 감지덕지하게 생각했다.



잡지 에디터, 라이선스지의 에디터가 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내 꿈이었다. 어릴 때 어른들이 자주 물어보지 않나. ‘넌 꿈이 뭐야?’ 나는 꿈을 꾸는 게 좋은 건 줄 알고 꿈을 꿔버리고 말았다. 잡지 에디터의 꿈. 급기야 고등학교 때 ‘섹스 앤 더 시티’를 본 후로는 주인공 캐리처럼 멋진 칼럼니스트가 되어 책까지 내겠다는 꿈을 꾸기에 이르렀다. ‘섹스 앤 더 시티’야말로 어른들의 동화라는 것을 그때는 모르고서 말이다.



내 20대는 식이장애로 점철되어 꿈은커녕 제대로 살 수 있을지가 더 큰 화두였다. 그렇기에 회복하여 29살 늦깎이로 대학교 졸업을 한 나에게 잡지 에디터란 직업은 이제는 꿀 수도 없는 꿈인가 싶었다. 취업 전선에서 여기저기 두둘겨 맞다가 문득 이렇게 맞을 거면 차라리 에디터에 도전이라도 해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진짜 인턴 에디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최저시급도 안 되는 월급 100만 원으로 월세 50만 원을 내고 생활비까지 해야 하는 1년의 인턴 생활을 버틴 후 정식 에디터가 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이렇게 한 문단으로 설명하기에는 수많은 눈물의 드라마와 배신과 혐오 그리고 많은 카드빚이 그 안에 있지만 일단 이렇게 축약하고자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업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케이스가 탄생한 것이다. 30살이 넘어 에디터가 된 데다 잡지 에디터라면 으레 거치게 되는 어시스턴트 기간이 없는 에디터 말이다.(사실 이름만 인턴 에디터지 하는 일은 어시스턴트와 비슷했지만 말이다) 그때는 인간 승리라고 생각했고 스스로가 대견해 미칠 지경이었다. 퇴근 길에는 ‘행복해’라고 육성이 튀어나올 정도였고 회사가 너무 좋아서 죽을 때는 일하다 과로사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꿈같은 몇 개월을 만끽하던 중 짤린 것이다.



그렇게 첫 실업급여를 받게 됐다. 그때는 나라에 낸 세금도 얼마 없는데 다달이 생활비를 주다니 참 감사하단 마음이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자취 생활을 버티려고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옅은 숨을 쉬며 지냈다.



제이 콘텐트리로 옮겨간 매체는 새로운 가족을 맞는 환영 행사로 연일 파티 분위기였다. 이놈의 SNS는 알고 싶지 않은 소식까지 눈앞에 보여줬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잡지들이 하루아침에 폐간하는 상황에서 제이콘텐트리도 4개의 잡지를 순차적으로 폐간하며 <에스콰이어>의 빈자리는 폐간된 잡지의 에디터들로 하나둘씩 채워졌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회사를 좋아해도 회사는 날 버릴 수 있다고. 회사를 좋아하는 건 짝사랑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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