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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Oct 12. 2021

월급 100만 원의 아름다운 세계

일 배운만큼 빼고 쳐줄게 

<(나의)노동의 미래> #02


패션계는 참으로 묘한 곳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백만 원짜리 옷을 만드는 회사에 다녀도 월급은 채 1백만 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명 '열정 페이'.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워야 하는 도제식(도제 관계와 같이 제자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방법) 교육을 받아야 하는 분야에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던 노동력 착취다. 



디자이너 지망생들은 고급스러운 감각을 입에 풀칠할 정도의 월급으로 키워야 했다. 같이 졸업했던 대학 동기는 무거운 원단을 이고 지며 동대문 종합시장을 날마다 누비는데도 7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월급을 견디지 못하고 입사 몇 달 만에 퇴사 후 외국으로 떠났다. 몇 년 전부터 ‘열정 페이’란 말이 사용되고, 어떠한 이유에서도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불법적인 행위라는 인식이 강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업계에서는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에 대한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패션계와 닿아있는 패션 잡지계도 비슷했다. ‘도제식’으로 일을 배워야 하는 묘한 전통이 이곳에도 있었다. 직급보다는 서로를 ‘선배’와 ‘후배’로 지칭하며 대부분이 정식 기자가 되기 전까지는 어시스턴트라는 기한 없는 비정규직 시절을 거쳐야 한다. 



이 어시스턴트는 대부분의 잡지 기자들이 거쳐가는 단계인데 이 기간을 거친다고 해서 꼭 기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이 기간 또한 짧게는 1년에서 3년 이상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어시스턴트 기간을 거치며 선배들에게 기자로서의 기량을 전수받는 시간은 잡지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다. 

 


잡지 어시스턴트의 주 업무는 촬영에 사용할 소품의 섭외와 픽업 및 관리 등으로 ‘협찬’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과정이다. 먼저 화보 촬영에 앞서 사수가 요청한 소품을 정해진 촬영 날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브랜드나 홍보대행사에 연락해 섭외한다. 그리고 촬영 때 모든 소품이 세팅될 수 있도록 전날까지 모든 브랜드 및 홍보대행사로부터 직접 방문하거나 퀵서비스를 이용해 소품을 픽업하고 검수한다. 이 소품은 촬영을 위해 브랜드로부터 잠시 대여한 것이기 때문에 촬영 중 손상되어선 안된다. 



이를 위해 촬영 내내 어시스턴트는 소품을 관리해야 한다. 의류의 경우 세탁이 필요한 오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유리나 세라믹 등의 재질은 깨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특히 고가의 주얼리나 시계를 다룰 경우는 아주 작은 흠집이나 도난에 더 철저하게 주의해야 한다. 촬영이 끝난 후에는 모든 소품을 다시 정리하여 브랜드로 반납한다. 그리고 마감이 시작되기 전까지 촬영에 사용했던 모든 제품의 상세 정보를 사수에게 넘겨주는 것까지 어시스턴트의 일이다. 



문제는 브랜드를 통해 대여할 수 없는 소품이 필요할 때 생긴다. 사수가 ‘소품이 있으라’ 명하면 소품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사수가 원하는 소품을 찾을 때까지 때로는 을지로를 헤매고 때로는 이태원을 헤맨다. 이렇듯 매달 소품 속에 파묻혀 지내는 와중에도 사수의 어깨너머로 기자 업무를 배워야 한다. 도제식이라고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마감 속에서 체계적으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턴 에디터(어시스턴트) 시절 날 가장 곤경에 빠뜨렸던 것은 갈색 티셔츠다.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물건도 아니었고 특정 문양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갈색의 무지 티셔츠 말이다. 의류 화보를 위한 의류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여름의 초입이었고 모든 브랜드가 청량한 컬러의 제품을 선보였다. 갈색 티셔츠라는 평범해 보이는 단어의 아이템은 알고 보면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나는 홍보대행사란 홍보대행사는 다 돌며 갈색 티셔츠를 찾기 시작했다. ‘갈색 티셔츠가 있으라 그러면 그곳에 갈색 티셔츠가 있노라니’ 



열 곳이 넘는 홍보대행사를 돈 끝에 한 브랜드에서 드디어 갈색 티셔츠를 찾았다. 드디어 이 긴 고행이 끝을 맺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모든 브랜드가 모든 잡지에 협찬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마다 추구하는 이미지와 타깃층이 있다. 만약 협찬을 요구하는 매체가 브랜드 이미지와 맞지 않다면 담당자 재량으로 이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찾은 갈색 티셔츠의 브랜드는 내가 소속해 있던 매체의 협찬 요청을 재차 거부해 왔던 브랜드였다. 



절박한 상황에서 협찬을 거부당하니 홍보대행사의 수많은 행거에 걸린 옷들 중 그 한 벌, 그 갈색 티셔츠를 결국 훔치기라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이르게 됐다. 그렇게라도 내가 맡은 소품 섭외라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고 싶었다. 협찬조차 제대로 못 해내는 어시스턴트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촬영장에 가져가야 하는 것은 외국에서 공수해와야 하는 대단한 물건이나 수천 만 원의 보석이 아닌 고작 갈색 티셔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고작 갈색 티셔츠를 위해 절도를 저지를 마음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갈색 티셔츠를 촬영장에 세팅해 두었다. 훔쳤냐고? 협찬을 받아오진 못했지만 절도범이 되지도 않았다.갈색 티셔츠를 발견했던 브랜드 매장에 가서 동일한 제품을 내 돈으로 지불했다. 당시 월급이 100만 원이었으니 월급의 1/10 정도를 소품을 사기 위해 쓴 것이다. 내 절박했던 심정이 무색하게 갈색 티셔츠는 촬영에 쓰이지 않았다. 역시나 청량한 여름옷 사이에서 갈색 티셔츠는 따로 놀았다. 



사람이 살면서 다양한 감정과 충동을 느낀다지만 그것들 중에서는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 있다. 내게 ‘이걸 훔쳐야 하나?’라는 절박함은 인생을 살며 굳이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고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월급이 더 높았다면 조금이라도 괜찮았을까? 적은 월급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면 괜찮았을까? 빈곤함과 절박함은 윤리 의식마저 흔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식 기자가 됐다. 힘든 때가 있으면 좋은 때도 찾아오듯 그 여름 이후 상황은 차츰 나아졌다. 혹은 내가 독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대학 동기가 패션계를 떠나 외국으로 갔듯 나는 패션계를 떠나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내 생각을 이미지가 아닌 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옮겨간 매체의 편집장은 패션팀에 있던 나를 피처팀의 정식 에디터로 입봉시켰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며 TV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던 디자이너에게 면접을 치른 적이 있다. 월급은 많이 못준다고 못 박고서 그는 질문을 시작했다.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이래서 4년제 나온 애들은 안돼’라고 말했다. 무슨 질문에 무슨 답변을 했는지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저 말만은 여전히 뇌리에 박혀있다. ‘군말 없이 심부름 잘해줄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것인가’란 생각에 화가 났었다.  



인턴 에디터를 거치면서 위에서 언급한 면접으로 쌓인 화는 무색해졌다. 절박한 마음으로 살던 시기를 거치며 나는 부당한 대우에 익숙해졌고 부조리에 무던해졌다. 헐 값에 팔았던 노동력은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나는 군말 없이 심부름을 잘해주는 값싼 노동력이 되어 버렸다. 어렵사리 얻은 내 것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이기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사리 얻은 기자라는 타이틀을 잃게 되었을 때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고 나는 어느순간 신세한탄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독해졌다.   



나는 독해진 내가 좋다. 가끔 치밀어 오르는 화는 인생에 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좀 더 편안하고 평온한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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