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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Oct 27. 2021

텃밭에 로망을 심었다

도시농부 도전기

<비혼주의 동거커플 동거집 ep.1>



올해는 처음으로 텃밭에 모종을 심었다. 우리 집엔 화단이라고 하기엔 큼지막하고 텃밭이라고 하기엔 작은 그런 큰 화단이 있는데 여기에 무언가를 기른 게 처음은 아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함께 살았던 친동생이, 그리고 작년엔 동거를 시작한 가또가 고추나 가지 등을 심었다. 나는 그 모종들이 커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그저 보는 것만 좋아할 뿐 스스로 무언가를 심어서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퇴사는 새로운 도전의식을 이렇게나 부추기는 건지 나는 올해 처음, 그러니까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텃밭을 가꿨다.


가또의 모종 가지, 고추, 파프리카, 셀러리, 겨자채


때는 5월로 모종을 심기에는 조금 늦은 시기였다. 이미 가또가 모종 몇 가지를 심어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기른다는 것은 기르고 싶은 식물을 고민하고 결제해서 택배 상자를 뜯는 과정까지 포함해야 했다. 그렇게 둘러본 모종 판매 사이트에서 내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바로 수세미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애매한 이 덩굴식물을 기르고 싶었던 이유는 말하자면 업보이자 로망이다. 아크릴 수세미를 만든 이의 업보 그리고 제로 웨이스트에 대한 로망.



가또와 나의 텃밭



업보와 로망과 함께 장바구니에 넣었던 모종들이 집에 도착했다. 옥수수, 케일, 로메인, 방울양배추, 라벤더 그리고 화분에 심을 유칼립투스와 몬스테라 등이 신문지에 꽁꽁 쌓여 있었다. 내가 텃밭에서 기르고 싶었던 작물은 대부분 로망과 연결된다. ‘직접 키운 로메인으로 샐러드를 해 먹고 케일 주스를 갈아 마시면 정말 멋질 거야!’. 내가 선택한 모종은 이렇게 멋져 보일 것 같은 애들이었다. 수세미는 이 로망의 절정이었다.





직장 일의 연장선으로 아크릴 수세미 뜨개를 배워야 했다. 코바늘은 즐겨하지 않았지만 계란 프라이나 스마일 모양의 수세미는 그 자체로도 귀여워 꽤 재미를 붙이게 됐다. 퇴사하고는 시간도 많고 수세미실도 많아 하루 종일 아크릴 수세미를 잔뜩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다. 수세미실의 소재가 플라스틱이라 설거지를 할 때 쓰면 환경에 좋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세미실로 만드는 수세미인걸 괜찮겠지. 그렇다고 이미 만든 걸 다 버릴 순 없잖아’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아크릴 수세미에서 나오는 미세 플라스틱의 양은 심각한 수준이고 수세미의 경우 그 잔해가 모두 바다로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씨스피러시>를 보며 분노하면서도 아크릴 수세미의 심각성은 모른 척 이중적인 행동을 했다. 수세미를 키우는 것은 그에 대한 속죄라 할 수 있다. 환경오염이 없는 진짜 수세미를 수세미로 사용하되 간편하게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얻어서는 안 되고 수세미를 기르는 정성까지 들여야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바다오염을 걱정하며 행동하는 진짜 환경애호가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질 것도 같았다. 


수세미 모종과 결국 옥수수를 휘감고 올라가버린 수세미 덩굴


문제는 수세미를 키우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수세미는 많은 양분을 섭취하는 식물로 토양이 굉장히 비옥해야 잘 자라난다. 또한 덩굴식물이니만큼 독립적으로 키우지 않으면 덩굴이 다른 식물을 마구 타고 올라가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 집 텃밭은 수세미를 기를 수 있는 환경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수세미를 기르고 싶은 마음만 있었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수세미는 자꾸 다른 식물을 타고 올라갔고 결국 뽑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수세미뿐만이 아니다. 케일에는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잔뜩 생기고 로메인은 키가 자라 결국엔 뽑아버렸다.


잘 자라난 가또의 가지와 파프리카, 그 가운데 여기저기 휘어져 다른 작물을 위협하는 내 방울토마토


반면 가또가 심은 모종은 자리를 잘 잡고 열매를 맺었다. 그의 집안은 농사를 해서 가또는 어릴 때부터 식물과 가까웠다. 식물의 상태를 잘 살피고 때에 따라 영양제나 농약을 줬다. 가또가 심은 고추나 가지는 대체로 잘 자라는 애들이다. 가지치기를 해줄 필요도 없고 병충해에 비교적 강해 처음으로 텃밭에 도전할 때 인기가 많은 작물이기도 하다. 가또는 우리 텃밭에서 키울 수 있을만한 식물을 잘 파악해서 심었고 관리 또한 잘해주었다. 그에 비해 내가 겨우 끝까지 보살폈던 방울토마토는 제때 가지를 쳐주지 못해 항상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서투른 로망가이고 가또는 현실주의자다.



로망을 좇거나 안정을 추구하는 우리의 이런 성향은 때때로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무턱대고 일단 저질러야 예상치 못한 경험이 생기듯 만약 가또 혼자였다면 절대 해보지 못했을 경험이 그의 인생에 추가되기도 한다. 스님들이 입는 법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고 캠핑까지 간다든지 유튜버가 되어본다든지. 이런 경험은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혼자서는 절대 하지 못했을 경험이다. 그와 내가 함께이기에 할 수 있는 경험.


잘 커준 라벤더


우리가 함께 가꾼 텃밭도 그랬다. 내가 무턱대고 사버린 모종 속에는 가또의 예상과 다르게 우리 집에서 잘 자라준 아이들도 있다. 방울양배추나 라벤더 같은. 방울양배추의 좋은 점은 이파리를 먹는 것이 아니라서 잎에 애벌레가 생겨도 괜찮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덕에 마당으로 날아든 배추흰나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라벤더의 경우 그냥 심어놓기만 했는데도 텃밭에서 아주 풍성하게 잘 자라주었다. 내년에는 방울양배추와 라벤더 모종을 조금 더 심어볼 생각이다.



수세미를 위해서는 따로 화분을 준비할 생각이다. 한쪽 벽 밑에 화분을 준비하고 덩굴이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지지대도 준비해서 잔뜩 수확한 진짜 수세미로 수세미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지금의 내 로망이다.


가또의 셀러리



가또의 로망도 있다. 사실 가또는 고추와 가지를 사면서 셀러리 모종도 샀었는데 이건 그의 작은 로망이었다. 흔히 셀러리의 줄기를 먹지만 우리는 셀러리 잎을 고수처럼 국수의 고명으로 넣거나 전을 부쳐먹는 걸 좋아해서 허브처럼 셀러리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셀러리는 수경재배에 더 어울리는 식물이었다. 우리 텃밭의 셀러리는 항상 수분 부족 상태에 시달리다 시름시름 생을 마감했다. 내년에는 셀러리로 수경재배도 해봐야지. 가또의 로망은 내 로망이 되기도 한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며 시간이 가는 것을 늙어가는 것으로 밖에 연결 짓지 못했다. 3월생인 내게 봄이란 남들보다 만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버려 슬프지만 벚꽃이  너무 예뻐 더 슬픈 그런 계절이었다. 그런데 텃밭에 새로운 모종을 심고 수세미 화분을 들일 생각을 하니 이렇게 내년 봄이 기다려질 수 없다. 내년이면 조금은 능숙해진 도시농부가 되어 조금은 익숙해진 로망을 텃밭에 다시 심을 생각이다.   





더 많은 텃밭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영상도 시청해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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