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라는 말을 이번 주에만 몇 번 썼는지 모르겠다. 추석과 공휴일이 있던 10월은 별 생각 없었는데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11월이 되고나서야 실감하고 있다. 이제 와서 한 해의 시작을 더듬어 떠올려 보고, 일 년 간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 봤을 때,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다. 글을 더 써야 했는데.
작년에 글쓰기 수업을 받고 난 이후로 계속 글을 쓰고 있다. 단순히 블로그나 sns에 개인기록을 남기는 것 이상으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서를 작성하고 투고를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주위에 널리 알렸다. 나는 책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고. 남들에게 나를 숨기기 급급했던 예전의 나와는 사뭇 달라진 부분이다. 이렇게 온 동네에 내가 글을 쓴다는 소식이 퍼졌지만 정작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나 자신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이들이 책을 내고 출간 계약을 하는 동안 나는 한 발 딛기도 힘들어했다. 써야 하는데, 라는 마음은 늘 굴뚝이었지만 몸이 바쁘고, 때로는 마음도 바빴던 나에게선 글 한 자 새어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그만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는 마음이 스물스물 기어나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달콤한 목소리가 슬며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정씨, 글을 한 번 쓰고 나면 그전으로 돌아갈 순 없는 거야.”
글쓰기 수업을 받을 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려 봤지만 글을 쓰지 않은지 오래라 내 글쓰기엔 그저 먼지만 횡량하게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이런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 하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관심이 없던 프로게이머, 페이커다. 게임은커녕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나 노래조차 모르는 나는 ‘리그 오브 레전드’(롤)라는 그의 게임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갈리오니 넥서스니 하는 모르는 말들로 가득한 페이커의 결승전 영상을 검색하고 그의 활약상을 찾아보는 것은 그가 지나온 시간들 때문이다.
그는 이미 십 여년 전에 세계 정상에 자리에 올랐다. ‘불사 대마왕’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마저 그 앞에선 담백할 정도로 데뷔와 동시에 정상을 거머쥔 그의 지난날은 화려했다. 하지만 다양한 까닭으로 5,6년이 지나 슬럼프를 맞이했다. 사실 그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오래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을 뿐, 선수로서의 생명이 짧은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된 패배에 팀은 와해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었다. 그의 팬들 중 일부는 등을 돌렸고 누군가는 그가 은퇴할 때라고 떠들어댔다.
‘이 정도면 충분해.’,‘나라면 그만뒀다.’
그가 처참하게 패배한 경기 동영상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최고의 기록을 세웠으므로 더 이상 힘든 경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페이커는 내가 아니었다. 그는 얼마 전 치워진 올해의 롤드컵에서 다섯 번째 우승을 하고 mvp에 오름으로써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2013년 첫 우승을 떠올려 보면 11년 뒤에 또 우승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명성을 되찾은 그의 슈퍼플레이에도 나는 그보다 몇 년전 패배한 경기를 굳이 찾아봤다. 그리고 그 날, 그의 쳐진 어깨를 눈여겨 봤다.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도 떠올려 보며 그가 오랫동안 걸어온 어두운 날들을 세어본다. 수렁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슬럼프 속에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대중의 실망,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그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게 한 것일까.
그 대답은 그가 그동안 해왔던 인터뷰에서 찾았다. 어느 자리에서건 은퇴를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한결같았다.-“아직 생각해 본 것은 없다. 다만 오늘 해야 하는 연습, 다가오는 경기에만 집중할 뿐이다.”
이러한 그에게 중국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긴 강,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말을 했다. 해마다 많은 선수들이 지고 뜨는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 그는 오래도록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한 수많은 극찬과 감탄, 때로는 조롱과 비난 속에서 묵묵히 가는 모습을 떠올리자면 조용하지만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충분한 건 없어. 나에게는 여전히 가야할 길이 있다.’
자신을 넘겠다는 후배선수에게 “증명해 보이세요.”, 라고 말하던 그 모습도, 세계 챔피언으로의 길을 걷겠다는 중국 팀에게 “모든 길은 저로 향합니다.” 라고 말하던 모습도 멋졌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패배한 모습을 마음에 새긴다. 나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야지, 페이커처럼. 멈추지도, 먼곳을 바라보지도 말고 그저 오늘 이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