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치가 보내온 원기옥

제주의 겨울은 파치가 가득하다

by 뿌리샘 김여정

바야흐로 귤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일 오고가는 출퇴근길마다 돌담 너머 주황색 알전구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가 보인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은 다른 계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사를 나눌 것이다. 바로 이렇게.

“집에 귤 있어?”

서로의 귤 보유 여부를 확인하며 안부를 묻는 제주만의 겨울 인사다. 혹시라도 없다는 답이 돌아오면 안타까워함과 동시에 신나서 귤을 나눠준다. 가끔은 있다고 해도 의기양양하게 더 맛있는 귤이라며(우리 집 귤 맛을 어떻게 아는 진 모르겠지만) 주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받은 귤들은 그 출처가 가족, 이웃, 직장동료 등 가지각색인 덕분에 품종과 맛도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상품이 아닌 비상품, 제주도 말로 ‘파치’라는 것이다. 어쩌면 제주도민들은 매 겨울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겸사겸사 함께 파치를 처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삼스레 이러한 사실을 떠올리게 된 건 얼마 전 있었던 ‘신귤문예 콘테스트’ 때문이다.


요 근래 두 어번 공모전에서 수상한 후로, 까닭모를 자신감이 턱 끝까지 차오른 요즘이었다. 그래서 귤과 자신의 이야기를 주제로 백일장이 열린다는 공고를 보았을 때,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분야가 ‘창작시’라는 사실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상금이 100만원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한 번도 시를 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회당일, 대회장에 도착한 사람 중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4등까지 상금이 걸렸지만 앉아있는 인원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주최 측 말로는 날씨가 궂어 사전 신청한 인원이 절반 밖에 오지 않았고, 예상했던 당일 신청자도 거의 없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다고 생각하며 전날 밤새워 쓴 시를 제출했다. 2시간 후 시상식을 한다니 그 때까지 근처에서 식사나 하고 있을 심산으로 대회장을 나섰다.

낯 선 동네의 처음 가 본 식당은 비싼 가격에 비해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맛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수상자에게는 시상식 전 개별연락을 준다고 하였으니 밥 먹는 내내 내 시선은 핸드폰으로만 향했다.

‘심사위원들도 식사해야 하니까 나중에 전화주려나 보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오지 않는 전화에 덜 실망하려고 애쓰며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되게 꼼꼼히 심사하나보네.’, ‘잘 쓴 시가 많아서 가리기 어렵다 보다.’

심사위원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애쓰던 나는 결국 마시던 차의 얼음이 반 쯤 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귀포의 한 카페에서 제주시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필 들어선 길이 516 도로의 초입이었다. 구불구불해서 운전하기 힘든 코스라 평소에는 피하는데 오늘따라 네비게이션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이었다. 별 수 없이 길에 들어서 운전하는 데 역시나 커브가 많았다. 모퉁이 하나 돌면 또 모퉁이가 나오고, 왼쪽으로 핸들을 꺽으면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어야 했다. 마치 내가 선과장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귤이 된 것만 같았다. 떼굴떼굴 구르며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탁탁 걸리는 모양새가 비슷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받은 판정은 파치일 것이었다.

귤이 상품으로 선별되려면 애초에 정해놓은 사이즈와 비슷해야 한다. 그 틀보다 작거나 크면 파치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쓴 시는 틀보다 작은 ‘꼬다마’였을까, 큰 ‘왕다마’였을까 생각하다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수많은 파치들이 떠올랐다. 상품으로 팔리지는 않았을지언정 여전히 내 손과 입에 남아있는 상큼한 맛과 향이 생생히 기억나자 파치니 상품이니 하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 동그란 한 알에 담긴 뜨거운 햇살과 거센 바람은 크기나 모양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 또한 비슷했다. 사회가 정해놓은 그럴듯한 성공의 기준으로 가치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변별할 순 없었다.

그러니 여지껏 파친지 상품인지 의식하지 않고 그저 맛있는 귤 하나 까먹으며 지새던 겨울밤처럼, 앞으로도 내게 하루가 새롭게 주어질 때마다 감사히 여기며 글을 써 나갈 것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파치가 되든 상품이 되든 간에 계속해서.




나의 아이들에게

김여정

귤꽃 같은 새끼들을 품은 어미가

두려워하는 것은

타 들어가는 햇살도,

바늘같은 빗살도 아닌

나의 과거를

따라걷는 자식들이다.


아이들아,

요 동그란 구멍보다

모자라면 꼬다마,

넘치면 왕다마라 한다더라.

상처 없이 고운 것은

골판지 박스에 올라가고

날카로운 바람에 베인 것은

푸대 자루에 던져지지.


행여 파치라 불릴새라

몸집을 불리면 그 안이 허하고

마음을 줄이면 하찮아져.

잎 뒤에 숨으면 깊지 못하고

단단하지 않으면 썩어버리지.


그러니

상자 속 왁스칠한 이를 욕망말고

바람 한가닥 날줄 삼고

땀 한 올 씨줄 삼아

하루하루 촘촘히 엮어내라.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추운 날,

가장 가난한 땅 위에 펼쳐진

황금빛 비단이 되고

깊은 밤 밝히는

노오란 전구알이 되어

잊히지 않는 맛,

사라지지 않는 귤내음으로 남아라.


자유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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