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상, 독일 사람들은 내 아이를 직접 만난 적이 없으면 내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통 Du(너)라는 단수를 사용했다.
아이를 직접 만나 일대일의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나와 아이를 한 묶음으로 묶어 함부로 Ihr(너희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독일인들에게 내 아이는 나와 독립된 하나의 개체라는 인식이 분명한 듯했다.
우리 사이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와는 여전히 하루에 한 번 정도 안부 메시지를 주고받았으며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만 그는 메시지에서 더 이상 Du(너)가 아니라 Ihr(너희들)이라는 복수형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 안에서도 말미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다음 만남을 제시했다.
독일어로 썸을 타면, 언어가 가진 특수성 때문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정보가 모호한 한국어에 비해 독일어는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언어의 성격상 정보가 명확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였다면 “주말에 시간 돼?”라고만 말을 해도 괜찮지만, 독일어는 주어에 따라 사용할 동사가 달라지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문장이라도 주어나 목적어에 대한 정보 노출 없이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어가 빠진 “주말에 시간 돼?”라는 말은 독일어로 불가능하다.
그는 나에게 “Wenn du Zeit hast(네가 시간이 된다면),”이 아니라“Wenn ihr Zeit habt(너희가 시간이 된다면),”이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의 물음에서 나는, 그가 우리 둘이 아니라 아이와 셋이 볼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아이와 함께 할 것을 고려해 대략 오전 10시에서 저녁 6시 사이에 만날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정보를 추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만난 뒤로 그는“Wie geht‘s dir?(너 잘 지내?)” 대신 “Wie geht‘s euch?(너희들 잘 지내?)”를 쓰기 시작했다. 주말 잘 보내라는 말도, “Dir(너에게) auch ein schönes Wochenende!”가 아니라 “Euch(너희들에게) auch ein schönes Wochenende!”였다.
그가 이처럼 너라는 단수가 아닌 너희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해 나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친절하면서도 기분 좋은 변화였다.
만나기로 한 당일 그가, 우리만 괜찮으면 함께 소풍을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웬 소풍이냐고 물었더니 차를 타고 가까운 자연으로 나가자고 했다.
갑작스러운 소풍 제안도 모자라 차를 타고 나가자니 놀라움과 동시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록다운 이후로 대중교통으로 하는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있느라 심심하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나와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두 달이 넘도록 집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차를 타고 나갈 정도의 소풍은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날씨도 좋은데 아이랑 드디어 집 밖을 벗어나 바람 쐴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서 서둘러 냉장고를 뒤지는데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전 날 장을 봐다가 근사한 도시락을 쌌을 텐데….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일단 준비했다.
만 열일곱이면 면허를 따고, 열여덟이면 운전이 필수인 나라, 독일.
자기 차가 없어도 가족이나 친구의 차를 빌려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동성을 갖춘 그들이기에 운전이 신기할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운전을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데다 독일 사람 치고도 동안인 편이라 그동안 딱히 남자답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운전하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섹시했다. 스니커즈 신고 가방 메고 걸어 다니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나는 오토로 면허를 따고도 겁이 많아 장롱면허만 십 년이 넘었는데, 기어를 수동으로 넣고 핸들을 돌리며 능숙하게 운전을 하는 그를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멋있다!
한국의 전래동화는 “옛날 옛적에 깊은 산골에 호랑이 한 마리가….”로 시작하지만, 독일의 전래동화는 “옛날 옛적에 깊은 숲 속에 늑대 한 마리가….”로 시작한다.
옛날이야기 도입부가 알려주듯, 한국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사방팔방 능선이 보이는 산의 나라지만, 독일은 작은 언덕들과 숲이 울창한 나라다.
섹시하게 운전하는 그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중심부로 운전해 들어갔다. 시내 중심을 가로질러 살짝 외진 길로 빠지니 꼬불꼬불 오르막 길이 나오고 좁은 골목을 조금 더 올라가니 울창한 나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사는 도시 한가운데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 당최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목적지는 생각보다 가까웠고, 주차하고 내리니 대충 감이 왔다. 우리가 가끔 놀러 가는 동물원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언덕길이었다. 버스 타고 지나다니며 눈으로만 봤지, 실제로 여기까지 들어온 적은 없는 것 같다.
차에서 내려 가방을 메려는 찰나, 그가 내 가방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내가 멜게.”
“아니야. 보기보다 짐이 많아서 무거워.”
아이가 유모차를 떼기 시작한 두 돌 반 무렵부터 기저귀, 갈아입을 옷, 간식, 물티슈, 수건, 물통, 책, 장난감 같이 온갖 것들을 가방에 꽉꽉 담아 하루 종일 메고 다닌 나다. 등에 그런 가방을 메고 앞으로는 15킬로가 넘는 아이도 안고 다녔다.
때로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장이라도 볼라치면 양손 가득 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럼 내 아이는 이제 겨우 세 돌을 지나고서도, 아무리 피곤해도 스스로 걸어야 했다.
집에 도착해 하루 종일 메고 다닌 가방을 내려놓으면 어깨가 가벼워지며 그제야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했다.
무게에 짓눌려 빨개진 어깨를 만지작거릴 때면 거북이 등딱지처럼 내 등에 딱 달라붙은 가방이 사라져 시원하면서도 그 묵직하고 뜨뜻한 감촉이 등에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게 뭔지 모르게 허전하기도 했다.
아이가 세 살 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기저귀나 가벼운 장난감, 옷가지들은 아이 스스로 메고 다니게 가르쳤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아이가 혼자 걸어 다니고, 짐도 더 많이 나눠질 수 있으니 훨씬 편하다.
무거워서 내가 들어야 한다는 말에 나보다 키가 한 자는 더 큰 그가 양 팔을 벌린 채 자기 덩치를 내보이며 빙긋 웃었다. 무슨 상황인지 얼른 감이 왔지만, 내 짐을 다른 남자가 대신 들어준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나 원래 아이 때문에 가방에 이것저것 많이 넣어가지고 다녀서 괜찮아. 그리고 이거 여자 가방이라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그럼 물 같은 것 만 줘. 내가 나눠 들면 아이는 가방 안 메도 되잖아.”
미처 생각지 못한 옵션이다. 그가 내 가방의 짐을 나눠 들면 내 아이가 무거운 가방을 메지 않아도 된다.
늘 조심스럽게 나의 의사를 묻고, 내가 괜찮다고 하면 여느 독일 사람들처럼 두 번 묻지 않던 그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의 짐을 덜어가려고 한다.
어딘가 모르게 그가 대담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가방을 메고 덜컹덜컹 뛰어다니던 아이가 막대기 하나를 주워 들고 사뿐사뿐 뛰어다니는 걸 보니 마음 한 편이 시큰해졌다. 그에게는 별 거 아닌 친절일 수도 있겠지만, 새삼 고마워졌다.
“짐을 덜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아이도 나도 편하네.”
조금 걷다 보니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호텔이 하나 나타났다. 가끔 구글 맵에서 위성 기능을 켜놓고 놀러 갈 만한 장소를 찾곤 하는데, 푸른 숲에 둘러싸여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할 게 분명해 한번 찾아가 보려고 했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대중교통으로는 진입하기 어려운 곳이라 길을 찾기가 애매했는데, 오늘 그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호텔을 감싸고 있는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발아래로 나무가 가득한 숲을 건너 시내가 한눈에 펼쳐졌다.
“와!!! 여기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구나! 진짜 멋지다! 여기 이 호텔이 있는 줄 몰랐어. 몇 년 전부터 한번 와봐야지 했던 곳인데 이렇게 오게 되네. 여기 오는 길이 이렇게 이어진 것도 그렇고, 신기하다.”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좋다! 우리 동네에 이런데가 있는 줄 몰랐어. 난 여행 다니면 항상 그 도시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거든. 여기 서 있으니까 꼭 여행 온 기분이야.”
“나도 여행 가면 높은 데 올라가서 전망 보는 거 좋아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집에만 있다가 나오니까 정말 좋다. 여기 데려와줘서 고마워.”
기분이 좋아서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활짝 웃는 내 얼굴을 보고 그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았다. 서로 호감이 있는 상대끼리 공통점을 찾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 정도 연애 패턴은 이 나이쯤 되면 익숙한 일이라 더 이상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와 나의 공통점을 알아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함께 걷는 내내 그의 시선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느꼈다. 쑥스러워서 모르는 척했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이 집중된 듯한 나를 향한 그 눈길을….
숲 속 비탈길 위로 커다란 나무뿌리가 마치 벤치처럼 뻗어 나온 것이 보였다. 셋이 앉아 쉬기에 충분해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올라가 좀 쉬기로 했다.
가방을 열고 내가 늘 싸가지고 다니는 3단 도시락 통을 보더니 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다 아침에 싼 거야???”
“응.”
“와, 너 대단하다!”
“애엄마랑 다니면 굶을 일은 없겠지? 하하하. 대단할 게 뭐 있어, 엄마들은 다 이래. 그리고 나도 먹는 걸 좀 좋아하거든.”
오늘 싼 도시락은 냉장고에서 자투리를 끌어다 급하게 싼 도시락이라 정말 별 게 없었다. 과대평가받고 싶지 않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쌌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했다.
맨 밑 통에는 밥솥에서 30분이면 다 지어지는 밥에 유부초밥 재료 세트를 이용해 간단히 유부초밥을 만들었고, 그다음 통은 소시지와 삶은 계란, 그다음은 오이, 방울토마토, 사과, 체리 같은 과일들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은 차갑게, 점심은 따뜻하게 먹는다. 차갑다는 말은 불을 쓰는 요리가 아닌 빵을 말하는 것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정성 들인 요리 자체를 하지 않는 문화인 데다 그와 내가 속한 독일의 8090 세대들은 특히 남녀가 평등하게 자랐기 때문에 여자라고 해서 요리를 더 잘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이어트용 샐러드나 조금씩 만들어 먹었을 젊은 독일 처자들만 보다가 아이 먹일 도시락을 바리바리 싸온 내 모습이 그의 눈에 신선하게 비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iebe geht durch den Magen.
사랑은 위(뱃속)를 타고 지나간다는 이 말은 내가 밥을 해주면서 행복해하면, 독일 친구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배부르게 해 주면 사랑에 빠진다는 뜻인데, 맛있는 요리가 유혹의 기술 중 하나인 것은 독일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하지만, 그가 내가 밥을 잘해주는 여자라는 이유로 나에게호감 갖지 않기를 바랐다.
대학에 다니면서 젊은 애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다 보니 별 얘기를 다 듣는다. 동양 여자들이 독일 여자들에 비해 요리도 잘하고 남자 친구에게 밥 해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는 걸 알고, 그런 동양 여자들만 골라 만나며 집에 불러다 태국요리, 중국요리, 일본요리 등을 즐겨 먹는 독일 남자들 얘기를 적지 않게 듣는다.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가려니 길이 가팔랐다. 폴짝폴짝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아이와 달리 나는 중심을 못 잡아 살짝 비틀거리고 있을 때, 그가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잡아 줄게.”
엉거주춤 자세로 그 자리에서 정지한 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몇 초가 지나버렸다.
차라리 처음에 손을 내밀 때 아무 생각 못한 듯 덥석 잡을 걸, 몇 초 망설이는 바람에 이제 와서 손을 잡는 게 더 어색해져 버렸다. 어떡하지….
그때 그가 씩 웃으며 한번 더 손을 들이밀며 말했다.
“한번 잡아봐. 믿을 만해.”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그가 내민 왼손 위에 올렸다. 처음 잡아보는 그의 크고 낯선 손의 감촉이 어색하다 느낄 때쯤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손을 잡고도 비틀거리는 나와 달리 그는 내 무게가 실린 손을 잡고도 두 다리를 땅에 딛고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었다, 내가 끝까지 잘 내려갈 수 있도록.
집에 돌아오니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그가 6시에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돌아가기 전 잠깐 창 가에 서서 대화를 나눴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우리 즐거우라고 일부러 소풍 가자고 한 것 같은데, 네가 그렇게까지 우리를 신경 써줄 줄은 몰랐어. 너 참 섬세하다. 고마워.”
“좋았다니 나도 기쁘다. 나도 즐거웠어.”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마실 거리를 내오지도 않았다. 대화가 길어질 만한 화제도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는 선뜻 가야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니 왠지 그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해서 밍기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저…. 네가 원한다면 이따 친구 만나고 나서 밤에 다시 들려도 되는데…. 그럴래?”
“그래도 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해맑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위아래로 힘차게 끄덕끄덕끄덕했다. 저렇게 좋아하다니, 물어봐 준 내가 다 뿌듯할 지경이다.
이렇게 보니, 머리 색깔도 그렇고 그는 꼭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 같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눕혀 책을 읽어주고, 재웠다. 집 정리를 마치고, 나도 좀 씻고, 쉬려고 앉으니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9시쯤 도착한다고.
나는 아이랑 저녁을 먹었는데, 아까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그가 친구들과 저녁을 챙겨 먹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랑 뭣 좀 먹었어, 아니면 아직 식전이니? 집에 아이랑 먹고 남은 게 좀 있거든.”
“아, 남은 게 있다면 감사하지.”
“슈파겔(하얀 아스파라거스)이랑 베이컨 넣고 크림소스로 만든 파스타야.”
독일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도 많고, 식재료에 알레르기가 있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음식을 가리는 사람도 많아, 초대를 하기 전 늘 재료를 설명해줘야 한다. 그는 가리는 음식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식성을 다 아는 게 아니라 조심스러웠다.
“와우! 넌 정말 진정한 요리사구나! 최고야!”
데이트하는 남자에게 밥을 안 해준다고 했지만,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끼니를 걱정하고 밥을 챙겨주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 참, 그게 문제다. 주변 사람들이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는지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인다.
그와 나는 아직 데이트하는 사이는 아니니까 괜찮은 걸까?
밥 해주는 여자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자꾸만 그에게 밥을 해 먹이고 싶어지는 이 마음!!!
이건 뭘까, 도대체!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젠가를 하고, 언제나처럼 많은 대화를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꽤 피곤하기도 한 데다 그가 평소보다 늦게 오는 바람에 얼마 머무르지 않았는데도 시간은 1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연신 하품하는 나를 보더니 그가 그만 가야겠다고 일어났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가 뒤에 섰다. 현관 앞에 서서 그가 신발을 신고 인사를 하려고 나를 돌아봤고, 나는 가벼운 포옹을 하기 위해 생각 없이 팔을 벌렸다.
그때 알아차렸다, 내가 담요를 덮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말인즉슨, 이미 인사를 하려고 팔을 벌린 나에게 그가 호응을 하려면 나를 담요 위로 끌어안던지 담요 안으로 손을 넣어 안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의중을 테스트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어버렸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짧은 순간 둘 사이에 서먹한 기운이 오고 간 걸로 봐서 그도 뭔가를 감지한 게 분명했다.
젠장!!!!!!!
속으로 욕이 나왔다.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내가 그를 떠보려고 한다고 그가 오해할까 봐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서둘러 변명을 할까, 아니면 창피하더라도 차라리 담요를 빨리 벗어버릴까, 쌀쌀하면 그냥 카디건을 하나 입지 뭐한다고 나는 담요를 덮고 지랄이었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던 그때,
그가 살짝 멈칫하는 듯하더니 나에게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담요 안으로 두 팔을 넣어 내 오른쪽 어깨 위로 가볍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가슴이 닿지 않도록 부드럽게, 하지만 힘 있게 내 상체를 끌어안았다.
헉!!!!!!!!!!!!!!
그가 나를 껴안았다!!!
정신이 아뜩해져 1-2초 정도 일시정지가 된 그때, 그가 곧바로 두 팔을 홱 빼더니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을 지나 성큼성큼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순식간의 상황이라 너무 놀라서 그가 가버리고도 한참을 얼음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어색해도 그렇게 어색할 수 없는 포옹이었다. 잘 가라는 가볍고 흔해빠진, 자연스러운 그런 인사여야 했건만, 누가 봐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게 어색하고 세상 불편한, 그런 포옹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나를 껴안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판단의 기로에 섰다가 담요 밑으로 두 팔을 넣어 일부러!!!
그는 정말 아주 간접적이면서도 매우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임이 확실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방으로 걸어 들어오다가 문득, 담요를 언제 마지막으로 빨았지? 하는 생각이 내 뒤통수를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