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상처와 새로운 남자 2/4
곧이어 그가 다 내린 커피포트와 머그컵 두 잔을 들고 거실로 따라 들어왔다.
휴대폰을 보며 딴짓을 하고 있는 내 앞에 잔을 내려놓더니 커피를 따라 주었다. 늘 내가 마시는 대로 우유도 살짝 섞어서.
휴대폰을 응시한 채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딴짓하는 나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내 곁으로 와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Schatz.(자기야.)”
조금 전까지 우뢰와 같이 울리던 크고 무거운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다정하기 그지없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니, 그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왜 그러는 건데….”
조용하면서도 자상하게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정말 나도 모르겠다. 왜 이러는 건지.
별 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요동치고 격해지는 시기가 있긴 하다. 월경할 때가 다가오면.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한 이후로 나는 평소와 다르게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거나, 사소한 문제 때문에 모든 것이 우울하게 느껴질 때면 달력을 찾아본다.
그럼 어김없이 월경 주기와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그날이 겨우 며칠 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맞은편에 앉은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말간 눈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매우 아파왔다.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쏟으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고 그는 눈이 똥그래져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파로 몸을 틀며 나에게 와보라고 손짓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소파에 앉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왼팔 가득 나를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이내 눈물이 잦아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왜 그런 거야, 도대체. 내가 잠옷을 갈아입은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아니야. 그거랑 상관없어.”
“그럼 뭔데.”
“나도 잘 모르겠어. 생각 중이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줬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
조금 전 그의 말과 말투와 눈빛과 몸짓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하다. 겨우, 고작 그 정도로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프다니, 서럽다니.
뭔가 이상하다.
그가 무슨 말을 얼마나 심하게 했다고 이게 이렇게 상처가 되어 내 가슴에 비수로 꽂힌단 말인가!
앞뒤가 안 맞다.
일단 지금 느껴지는 것부터 솔직하게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잘 꾸민다거나 언제나 멋지게 단장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알아. 너 원래 집에서 편하게 있잖아.”
“그런데 농담으로 시작한 말에, 네가 자꾸 집에서 편안 옷차림으로 있는 거에 대해서 여러 번 거부감을 드러내니까 좀 불편해지기 시작했어. 네가 언젠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내 전 남편이 옷 좋아하고, 꾸미는 거 좋아했잖아. 나랑은 정 반대로. 연애할 때는 아무 말 안 하더니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점점 그런 걸 거슬려하다가 결국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웠다고.”
말을 뱉어놓고, ‘아하’하며 그제야 나도 감이 왔다.
내 반응이 왜 그렇게 과했는지.
“아는데, 그런데 난, 네 전 남편이 아니야. 우리가 오늘 나눈 대화는 그런 과거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알아.”
“그런데 왜 그래.”
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전부터 거슬리던 것들을 이참에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한테서 전남편과 비슷한 모습이 보일 때마다 심장이 떨릴 때가 있어. 장단점 같은 그런 거 말고, 그냥 뭔가 비슷한 점이 보이면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 가끔은 걱정도 되고, 좀 겁이 나.”
“그렇지만 난 그가 아니야. 나는 그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 너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쓰레기 중에 상 쓰레기 같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미 6년이나 지난 일에 이제 와서 너랑 같이 그 자식 욕을 해 줄 수는 없어. 그건 너와 그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그는 두 손을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가 앉았다.
그를 비난한 것이 아니다. 나도 안다. 그와 전 남편은 다른 사람이고, 이 둘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아직도 전 남편과의 나쁜 기억으로 세상의 모든 남자를 싸잡아 매도하고 두려움에 덜덜 떠는 여자였더라면 이 남자와 새로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1년 간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갑자기 그와 전 남편의 공통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그게 심기를 조금씩 거스르는 게 나도 조금 혼란스럽던 참이다.
“알아. 너한테 같이 욕해달라는 뜻 아냐. 너와 그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이미 지난 일, 많이 극복했어. 알잖아.”
“근데 갑자기 왜 그래.”
“그걸 나도 모르겠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야.”
이런 말을 하게 되어 그에게는 유감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이 문제와 직면해야 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내가 생각에 잠겼고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