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나의 독자님 한 분께서 곧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보내주고 싶다 하셨다. 지금껏 그런 제안을 받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보통은 감사한 마음만 받고 끝낸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뭔가를 대가 없이 받기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일인 데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한들 그로 인해 나중에 어떤 오해가 쌓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거듭 꼭 해주고 싶다 청하셨고, 나 역시 한국에 못 간 지 오래라 슬그머니 욕심이 났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사고 싶었던 책 리스트 중에 아이 책 한 권, 내 책 한 권을 뽑아드리며, 대신 구입해 보내주시면 돈을 보내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그 반가운 선물을 받았다.
가족들 선물 바리바리 싸들고 한국에 오고 가는 것만도 일인데, 코로나로 챙길 것도 많은 와중에 생판 모르는 남의 선물까지 준비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
여건이 안돼서 사 올 수 없었다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잃은 것이 없는 친절한 제안이었는데, 내가 원했던 책 두 권에 소소하지만 매우 쓸모 있는 작은 선물들, 그리고 아이 책을 한 권 더 넣어주셔서 깜작 놀랐다.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서 해외 출입국시 정말 애물단지인 짐인데 그런 책을 남을 위해 세 권씩이나 챙겨 오시다니….
계좌를 불러 주십사 했지만 한사코 선물로 주고 싶으시다 하여 결국 알겠다 하고 우리 동네 사진이 붙은 카드에 편지와 작은 기프트카드를 보내드렸다. 지금쯤이면 내 카드가 도착했으려나…?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늘 생각만 하고 있던 백희나 작가에 대해서 써볼까 한다.
백희나 작가는 2019년 봄에 한국에 들렸을 때 처음 알게 된 동화작가이다. 언제나처럼 서점에 들러 아이가 읽을만한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점 가득 책은 언제나 넘치지만, 많아도 너무 많은 데다 이상한 책도 많아서 책 한 권 고르는 일이 쉽지가 않다. 게다가 비행기를 타고 이고 지고 가져와야 할 책이다 보니 한국에서 책을 고르는 일에 언제부터인가 굉장히 신중해졌다.
딱히 마음 가는 책이 없던 와중에 눈높이에 맞는 책장에 베스트셀러라는 딱지를 붙이고 백희나 작가의 “알사탕”이라는 책이 꽂혀있었다. 낯설지만 베스트셀러라니, 한번 꺼내 아이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구입한 옛날이야기 전집만 읽어주다가 현대 이야기라니 어색했지만 색달랐다. 나쁘지 않았다.
혼자 노는 아이 동동이는 어느 날 문방구에서 알사탕 한 봉지를 사게 된다. 그리고 알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을 때마다 동동이는 주변 사물이나 사람들의 마음속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처음 소파가 말을 했을 때에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우스웠다. 특히 방귀 얘기가 나오자 아이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키우던 강아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수염이 까칠한 아빠가 등장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 한 면이 온통 글씨로 가득했다. 읽어보니, 죄다 잔소리다. 소파 옆에 낀 리모컨을 찾을 때에도 잔소리가 많더니만 이 아빠, 무슨 아빠가 이렇게 말이 많지?
그런데 빡빡하게 인쇄된 글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숨도 안 쉬고 읽어 내려가다 문득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아빠는, 그냥 잔소리가 많은 게 아니라 싱글대디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아빠가 숙제를 확인하고, 물통을 확인하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잔소리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까지 엄마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동동이는 그런 아빠에게 화가 나서 몰래 사탕을 먹고 양치를 안 하고 자기로 한다. 책장을 넘기니 러닝 차림으로 설거지하는 아빠의 등 뒤로 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 라는 말꼬리표들이 길게 이어졌다.
아빠의 그 모든 잔소리들은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빠의 속마음을 알게 된 동동이는 아빠의 등 뒤에 폭 안겨 “나도”라고 말한다.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했다. 이 책 뭐지?
울컥하면서도, 이 아이가 정말 엄마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빠와의 에피소드인 건지 분명치 않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내 감정이 이입되어 오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 장이었다. 동동이가 불었던 풍선껌이 터질 때마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가 없네, 할머니가 돌아가셨네 하는 너저분한 설명 따위 없이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동동이는 아빠와 둘이 사는 아이이며, 엄마 대신 할머니가 동동이를 챙겨줬지만 이제는 그런 할머니마저도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동동이는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언제나 동동이가 혼자 노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할머니까지….
이 장면에서 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 노는 동동이를 걱정하는 할머니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빈이도 언제나 혼자 노는 아이였으니까.
서점에서 책을 읽다 말고 눈물 콧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갑자기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서 나를 다독거렸다. 나는 동화책이 너무 감동적이라서 우는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백희나 작가의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백희나 작가의 책에는 놀랍고 특별한 점이 많이 있다.
- 통속적이지 않으면서도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
- 구구절절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한다는 것
- 이야기 소재만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재 역시 다양해 책마다 새롭고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 전개가 창의적이며 재미있다는 것
-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토속적인 정서가 담겨있다는 것
그림 실력이나 인형들의 완성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스토리텔링 또한 아주 간접적이면서도 정확하고, 솔직하면서도 섬세하고 따뜻하다.
무엇보다 작가의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작가의 시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을 향한 믿음”이 내 마음속에 가장 와닿았다.
백희나 작가의 책을 보면 그 어느 책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 “사랑과 믿음”이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았고, 세상은 때론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그 믿음이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이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의 책에서는 언제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구름빵”에는 전형적인 4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알사탕”의 동동이는 부자가정이며, “이상한 손님”에는 형제자매 가정, “이상한 엄마”와 “장수탕 선녀님”에는 모자가정이 등장한다. “삐약이 엄마”는 입양가족을 약간 변형한 듯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나는 작가가 이런 다양한 형태의 가정에 굉장히 깊은 애정과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작가의 모든 책 전반에 걸쳐 등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내가 이혼을 하고 난 뒤 아이에게 이혼가정을 위한 동화책을 찾으면서 직접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한국, 독일을 막론하고 동화책에는 거의 대부분 3-4인 가족이 등장한다. 언젠가 엄마와 사는 아이 이야기 책을 어렵게 찾았지만, 아빠가 돌아가셔서 그런 아빠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내용이라 다시 내려놓은 적이 있다.
나야 모자가정이니 그런 것만 눈에 보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저소득층 가정, 다문화가정, 재혼가정, 가족 중 누군가 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정, 조손가정, 1인 가정, 서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진 가정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정의 모습들이 동화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여기 독일은 그나마 삽화에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시안은 역시 드물다. 한부모 가정에 대한 묘사도, “오늘은 아빠한테 가는 날” 이라거나 “우리는 여전히 널 사랑해”, “아빠는 그냥 길 건너로 이사 간 것뿐이야” 따위였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한동안 그런 책들을 찾아보다가, 이혼하고 아빠랑 연락이 안 되는 아이에게는 차라리 화목한 4인 가정의 이야기가 덜 상처가 되겠다 싶어 포기를 했다.
그랬기 때문에 백희나 작가의 책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특히 짠내 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 감동적으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녹여내는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 어느 책에서도 그 가정이 어쩌다 그런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동동이의 엄마가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이혼을 했는지, 아니면 어디로 떠난 건지, 심지어 동동이가 진짜 아빠의 친아들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결국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캐물어서 뭐하겠는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있고, 죽었다 깨나도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삶이라는 게 그런 것임을….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괜찮다고, 이런 가정도 있고 저런 가정도 있다고. 다만 그렇게 순간순간 살아가는 길목에서 어쩌다 마주쳤을 때 서로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 그런 게 사랑이라고. 작가는 동동이를 통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가상의 캐릭터를 좋아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동동이는 특별하다. 언제 다시 읽어도 코 끝이 찡해지며 동동이를 꼭 안아주고 싶어 진다.
지금도 백희나 작가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이고, 만약 동동이 인형이 있다면 사서 모으고 싶을 정도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동동이가 용기를 내 친구 한 명에게 다가가는 엔딩이 정말 마음에 든다. 동동이가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번에 새로 받아 본 책에는 동동이가 키우는 강아지, 구슬이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린 동동이와 생전의 할머니 모습도 보여 다시 한번 코 끝이 찡해졌다.
동동이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다면 좋겠다. 동동이가 아빠와 함께 멋진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일곱 살인 우리 빈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동이도 함께 자랄 수 있다면, 그럼 참 좋겠다.
또한 이렇게 다양한 가정의 형태를 그린 어린이 동화들이 앞으로 많이 나와 전형적인 가정에 속하지 않는 아이들도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와 아이에게 따뜻한 위로와 시선을 보내주신 백희나 작가님의 건승을 기원하고,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써주시기를 기대한다!
백희나 작가를 알게 된 첫날 모두 구입해 독일로 가져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