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사랑한다며!

by 뿌리와 날개

사랑에 빠지면서 세상은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에도, 신호등을 기다릴 때에도, 청소기를 돌릴 때에도 수시로 웃음이 났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벅차올랐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힘든 일이 있거나 슬플 때조차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어 행복했다.


이번 연애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나는 이미 누군가와 결혼으로 맺어졌다가 이혼을 해 본 사람이다.


다시금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미숙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조심하고, 배려했다.


소통도 끊임없이 했다.


혼자 삭이고 서운해하기보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감정이 해묵지 않도록 그때그때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썩 잘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도, 나도 꽤 먼 길을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정말 다를 수 있을 줄 알았다.








산업 재해와 그 징후의 통계적 법칙을 설명한,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 법칙에 따르면 사망자가 1명이 나오는 재해가 발생했을 때,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이미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그리고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했던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라고 한다.


1년 넘게 만나 오면서 우리 또한 사소한 다툼이 29번, 다툼으로 이어질 뻔했던 민감한 의견의 대립이 300번쯤 있었던 것일까?


언제나 그렇듯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사안의 중대성을 그도 알고 나도 알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쌓여갔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침착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하려고, 또 서로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양보와 배려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서로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결국 그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번 봇물이 터지자 그는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액셀을 밟았다.


관계의 지속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그 순간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나는 속도를 줄이며, 그 역시 그래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곧 내 심장을 가차 없이 들이받아 버렸다.


차마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그가 내뱉은 순간 공기는 싸늘해졌고, 우리의 관계는 달라져버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답기만 하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그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오랜 시간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려왔다던 남자도 결국 별 수 없었다.


이혼도 해봤고, 아이도 있으니 더 성숙할 거라 믿었던 여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깊어질 대로 깊어져 버린 감정의 골 앞에서 우리는 울며 불며 서로 더 많이 상처받았다고 악을 쓰는 어린아이들일 뿐이었다.


왜 엉킨 실타래는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엉켜만 가는 것일까?


서로 발톱을 세우고 있는 한, 그 어떤 대화나 화해의 시도도 결국은 다시 서로를 할퀴는 짓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멈추고 돌아서서 서로를 등진 채 우리는 당분간 각자의 방향을 향해 혼자 걷기로 했다.


슬펐다.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가 떠나고 혼자 남은 나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그와 나는 그저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야만 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내 등에 칼을 꽂은 것은 그인데 왜 그가 나보다 더 많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인가.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사람은 자상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어려운 일도 척척 나서서 해결하며 나와 아이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고, 내가 슬퍼할 때면 따뜻하게 감싸주던 사람이었다.


늘 나를 웃게 만들어주던 사람, 바다 같은 넓은 가슴으로 나를 포용해주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분노에 사로잡혀 언성을 높이고, 나를 비난하고, 상처받았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그런 어린애 같은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비슷한 상처를 준 이 사람이 과연 내가 처음에 사랑에 빠졌던 그 사람이 맞을까?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는 왜 나에게 상처를 주는가.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 역시 그러지 않았을 것을….


이게 그렇게까지 상처받고 나에게 화가 날 일이란 말인가.


치사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


그래 놓고 마지막에 와서는 분에 못 이겨 내 손을 놓아버린 사람.


그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이 정도 삶의 문턱도 함께 넘지 못할 사람이면 이쯤에서 나도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사랑한다고, 온 세상을 다 내 발 앞에 바칠 것처럼 너스레를 떨 땐 언제고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해 놓고 나 몰라라 하다니.


그가 미웠다.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간단했다.


그에 관해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그저 삐딱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를 등진 채 정처 없이 걷던 내 앞에는 어느새 그와의 이별이라는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사정없이 그곳을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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