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여행 간 사이 빌려준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보호소에 도착하니 An이 안 보인다.
10시 Haussammlung 시간이 돼가는데도 안 보이길래 느낌이 왔다.
보호소에 와서도 계속 남편과 연락을 주고받던 An...
남편이 하루는 너와 아이들 짐을 모두 버리고, 집 열쇠도 바꾸고 새 여자와 살겠다며 협박을 한다고 했었고, 또 며칠 뒤에는 알코올 중독 클리닉에 들어갈 계획이라며 아이들과 돌아와 주면 정말 잘 살아보겠다고 애원도 한다고 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이미 그녀가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예감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거고, 어렵게 보호소에 들어왔으니 일단 아이들과 먼저 자리를 잡고 난 뒤, 남편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심사숙고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해줬었다.
보호소에 처음 들어오던 날, 남편과 다시 잘해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더니 지난 4년간 충분히 기회를 줬다며 이젠 정말 새 출발 하고 싶다고 딱 잘라 말했던 그녀.
게다가 보호소에 들어온 게 이번이 벌써 두 번째라며, 돈도 안 벌고 술만 마시는 남편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는데...
10시 모임이 끝나고 아이들과 들어온 An의 얘기는 이러했다.
남편의 아버지가 8년 투병 끝에 돌아가셔서 남편은 아침 비행기로 일주일간 고국으로 떠났고, 친정엄마와도 통화를 했는데 남편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부친상을 당한 남편을 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라고 했다고..
그래서 주말 동안 집 청소를 했고, 당장 돌아간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집을 구할 때까지 비슷하게 보호소에 머물며 적적한 보호소 생활에 좋은 친구가 될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보호소에서 다시 혼자가 될 빈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아이도 내내 서운했는지 나와 빈이 곁을 맴돌았다.
나는 아이에게 너를 참 좋아한다고, 그동안 함께 지내서 즐거웠다고, 또 빈이를 잘 돌봐줘서 고마웠다고 인사하며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 빈이에게도 상황을 설명해주고 아이와 인사를 나누게 해 줬다.
아이는 엄마와 동생과 보호소를 떠나면서 천진난만하게,
"내일도 우리 여기에 올 거예요. 내일 봐요~"
하며 밝게 인사했다.
짐을 챙기면서도 표정이 밝지는 않았던 An..
옳은 결정인지 잘 모르겠다는 그녀에게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행운을 빈다는 말 밖에는...
An을 통해서 나는 내가 내린 결정과 그걸 지속해 나가는 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An이 나약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득이 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와 결혼한 것도, 아이를 낳은 것도, 그리고 이혼을 결정하고 집을 나와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도 모두 나에게 가장 득이 되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결정한 것이다.
An에게는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 가장 득이 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허울뿐인 무능력한 가장이라 하더라도 남편 그늘 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편안함이, 그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싱글맘으로 낯선 독일 땅에서 홀로 서는 수고보다는 득이라고 판단했으리라.
그리고 본인에게 가장 득이 되는 판단을 했다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혼자 몸이 아니라 아이를 둔 어머니이므로.
An과 아이들을 배웅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결정과 노력에 나 스스로 지지를 보냈다.
우리는 An처럼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 시간들을 잘 견뎌내야만 하니까.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