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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May 15. 2021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Scheiße(샤이쎄/빌어먹을) 같은 한 주의 시작

지난주 일요일부터 핸드폰이 먹통이었다.

공기계처럼 받는 것도, 거는 것도 안되고, 인터넷은 당연히 안되고...

알디에서 선불로 유심칩을 사서 끼운 지 한 달이 지났으니 충전을 해야 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친구가 알려줬던 대로 알디 카쎄에서 10유로짜리 알디 카드를 달라고 했다.

점원이 영수증을 끊어주며 여기 써진 번호를 충전하면 된다고 했는데, 충전한 지 이틀도 안돼서 폰은 먹통이고, 인터넷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분명 지난달에도 10유로를 주고 사서 한 달을 썼는데 이틀 만에 폰이 먹통이라니..


 

뭔가 이상한데 나는 도대체 모르겠어서 일단 월요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시내로 나갔다.

지금 나에게 모든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핸드폰이었기 때문에 쓰기 어려운 선불폰 대신 정식으로 통신사와 계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지고 나서부터 나는 꼭 하는 일이 있는데 바로 "화장"이다.

그리고 특히, 공적인 업무를 보거나 계약을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정장에 구두를 신는다.



핸드폰 계약도 계약인지라 이 날도 치마에 구두를 신었는데, 비가 왔다.

그것도 점점 세차게...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데 나는 치마에 힐을 신고, 한 손으로는 우산,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밀며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독일 시내의 바닥은 아스팔트가 아니다.

쪼갠 돌을 이어 붙인 멋스러운 바닥이라 돌 틈마다 구두굽이 낀다.



비 오는 날 그런 옷차림 만으로도 충분히 성가신데 발을 내딛을 때마다 돌 틈에 구두굽이 끼었다.



게다가 날은 왜 이렇게 추운지...

오늘만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나올 걸 싶었지만, 그래도 핸드폰 하나만 생각하며 꾹 참았다.

 








어렵게 핸드폰 대리점에 도착해서 나름 열심히 독일어를 들어가며 옵션을 골랐다.



삼성 갤럭시 S5에 1기가 인터넷이 44.99유로.

삼성 갤럭시 S5에 3기가 인터넷은 49.99유로.

핸드폰 없이 1기가 인터넷은 39.99유로.



적은 가격은 아니었지만, 나는 통화나 문자보다 인터넷이 월등히 많이 필요했고, 폰이 있든 없든 가격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나 혼자 선뜻 계약을 하는 게 겁이 났다.

폰이 먹통이라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날씨도 너무 안 좋고, 옷차림도 불편해서 그냥 빨리 계약을 해버릴까 했지만,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어 힘들더라도 다른 곳도 좀 둘러보고 오려고 상담을 마친 뒤 대리점을 나섰다.



이 곳에서 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대리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말이 5분이지 폭우 속에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어가며, 돌 틈에 구두굽이 끼어가며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옷이 흠뻑 젖어 한참만에 도착한 그곳은 점포정리 및 이사 중...



방금 전 내가 다녀왔던 그 가게가 모든 통신사를 통합한 대리점이라고 했다.

어쩐지... 걸어오는 내내 나는 다른 대리점을 찾아봤지만 그 번화한 시내 한복판에 다른 대리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니만..

그래서 그랬나 보다.



내가 처음에 갔던 곳에서 그냥 계약을 하면 되는 거였다.



하... 이 바보...








빗 속을 뚫고 다시 돌 틈에 구두굽이 끼어가며 유모차를 밀고 다시 그 대리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49.99유로짜리를 고르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 신분증과 은행카드가 필요했다.

주소를 적는데 보호소에 사는 것 때문에 좀 복잡했지만 그것도 잘 마쳤다.



대리점 직원은 Prüfung 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아는 프뤼풍은 시험인데, 시험을 친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뭔가 체크를 하는 것 같았다.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그걸 통과해야 계약이 완료되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이 나는 비를 뚫고 다시 밖으로 나가 밥을 먹고 왔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돌아왔는데 대리점 직원이 여전히 프뤼풍 통과를 못했다며 나중에 전화 줄 테니 다시 오라고 했다.



이미 밖에 나온 지 3시간이 넘었는데 이 날씨에 내가 어딜 가서 다시 기다리고 있는단 말인가.

게다가 30분이면 된다던 프뤼풍이 한 시간이 넘도록 안되고 있다는데...



또 핸드폰 없이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게 좀 답답하긴 했지만, 아기도 나도 좀 힘든 하루였기 때문에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








보호소로 돌아와 힐을 벗고 스타킹을 벗고 비에 젖은 옷을 벗어냈더니 살 것 같았다.

너무 추웠고, 발도 아팠고, 피곤했다.



무엇보다 그 노력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허탈했다.

그래도 내일은 더 이상 충전 걱정 없는 새 핸드폰이 손에 있겠지 하며 피곤한 심신을 달랬다.



그러나 이 거지 같은 하루는 이 Scheiße(샤이쎄 / 형편없는, 빌어먹을) 같은 한 주의 시작일 뿐이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검색어 "Traurige Frau"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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