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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May 15. 2021

나는 망가지고 있다

힘들었다.

너무나 힘들었다.

대략 2주 정도 된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힘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나 많은 감정의 기복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은 나에게 도움을 주던 지인과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내 나름대로 배려라고 생각하고 했던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 큰 오해가 되었고, 내 입장에서는 예의와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 이런 오해가 생기게 되었는지 깨닫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오해가 잘 풀리기까지 너무나 불편한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생각의 생각을 거듭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고 그 오해가 풀림과 동시에 나는 안도감과 서러움에 복받쳐 지난 두 달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리고 남편의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이혼할 때 포크, 나이프 하나까지도 똑같이 나눠가진다던데 남편이 나와 나눠갖겠다고 적은 목록에는,



1. 소파

2. 아기침대와 아기 서랍장

3. 식탁과 의자

4. 옷장

5. 서랍장 2개

6. 매트리스와 매트리스 갈빗대



그리고 1-3은 나더러 가지고 자기는 4-6을 갖겠다고 했다.

소파는 너무 커서 우리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기 침대는 빈이가 잡고 서기 시작한 8개월 이후로 쓴 적이 없고, 아기 서랍장은 고장이 났다.

식탁도 나는 이미 샀고, 의자도 등받이가 없는 거라 아기랑 쓸 수 없다.



반면, 옷장은 쇼핑광답게 내가 없을 때 자기 맘에 드는 걸로 비싸게 주고 구입한 대형 사이즈였고, 서랍장 2개도 옷이 넘쳐나시니 당연히 필요한 물건이며, 잠을 자야 하니 매트리스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더러 내가 나갈 때 컴퓨터, 카메라에 식기며, 냄비며 포크 나이프까지 다 챙겨간 게 800유로 정도이니 물러나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노트북과 카메라는 각각 두대씩이고   남편  보다 싸구려이며, 모든 식기류는 나는 이랑   2개씩만 챙겼다.



5,6인용 짜리인데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나는 이랑  뿐이니  개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집에는 아직 티브이, 청소기, 세탁기, 미니 청소기, 다리미, 램프 등이 있었지만 남편은 전기가전은 아예 적지도 않았다.



친구 중 하나는 너희들 주방 없었냐고 물었고, 나는 그제야 집에 6,000유로짜리 주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한국에 보내 놓고 남편이 혼자 이사한 새 집이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주방 역시 나눠야 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사하기 전 집에서 받은 보증금, 그것도 반반씩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은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이미 그 보증금을 "내가 집을 더럽게 사용했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떼였다고 말했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었고,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몇 번씩이나 사과를 했었다.



독일로 돌아와 독일인 친구들 그 누구에게 물어봐도 1,800유로나 되는 보증금을 집을 더럽게 썼다는 이유로 집주인이 모두 가져가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법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그 보증금도 남편이 나와 나누기 싫어서 떼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남편은 우리 엄마가 독일로 보내준 70만 원짜리 극세사 이불 세트도 더럽다며 버렸다.

그것도 돈으로 돌려받고 싶었다.



나는 남편이 나에게 나눠주겠다는 목록을 보고, 다시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날까지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절반씩 나눠야 하는 모든 목록을 적어갔고, 전과는 다르게 변호사에게 아주 꼼꼼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돌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들 독일법이 남편 수입의 45%를 나와 빈이의 생계 부양비로 내도록 되어있다고 하는데, 나는 남편 이름으로 돈을 받아본 적도 없고 대략 1,300유로 정도 된다는 그 부양비도 만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 수입에서 얼마가 우리의 생계 부양비로 들어가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변호사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그건 잡센터와 내가 이야기할 문제지 자기 관할이 아니랜다.



이것 역시 듣던 것과 다르다.

변호사가 정산해 준 영수증 액수만큼 이혼한 독일 남편에게 꼬박꼬박 매달 계좌로 돈을 받고 있는 다른 한국분의 말과는 달랐다.



도대체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주방이며 보증금이며 반반씩 내놓으라고는 해놨지만 아는 분 말을 듣자니 그것도 남편이 줘야 받는 거지 강제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미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왔기 때문에 권리가 없다고 한다.



들을수록 분통이 터졌다.

나는 어차피 그 집에 머물 수도 없었다.

보통은 이혼을 하면 마지막 전입신고 주소지에서 여자가 버티고 안 나가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남편이 나를 한국에 보내 놓고 혼자 이사를 했고, 단독으로 전입신고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나는 예전에 살던 집이 마지막 거주지이기 때문에 독일에서 오갈 곳이 없는 처지라는 뜻이다.

나를 오갈 곳도 없는 처지로.. 남편이 그렇게 만들었다.



게다가 남편은 여전히 이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사는 16일에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아무런 세간도 없어서 16일이 한참 지나고도 우리는 여전히 보호소에 살고 있었고, 원활하지 않은 독일어 의사소통과 독일 사람들과의 문화 차이 때문에 도움을 주던 사람들과 오해도 자주 생겼다.


 

도움을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내가 이렇게 사방팔방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다 보니 도움을 받는 것 또한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도움을 주는 일에도 받는 사람을 배려하는 스킬이 필요하듯, 도움을 받는 일에도 도움을 주는 사람을 배려하는 스킬이 필요하다.



나는 그런 스킬을 몰랐다. 그저 조심스럽게, 고맙게 여기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는데..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괘씸함을 느끼기 쉽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은 비참함을 느끼기 쉬운 것 같다.

작은 오해들이 생길 때마다, 그리고 그것들을 풀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나는 점점 나 스스로가 초라하고 비참해져 간다는 것을 느꼈다.



 와중에 이는 날이 갈수록 상태가  좋아졌다.

이는 영민했다.



영특하면서도 예민한 아이.



그런 아이다 보니 엄마의 반응 하나하나에 보통 아이들보다 더 예민하고, 그래서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리도 곧잘 지르던 아이였다.



나는 성격이 세심하지 못한 편이라 그런 아이를 기질에 맞게 섬세하게 케어하는 게 그전부터도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정말 아이를 돌 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는 지난  달간 소리를 지르는  습관이 되었고, 특히 내가 힘들었던  2주간 아이는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게다가 보호소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하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도록 기저귀를  정신지체장애아였고  다른 하나는 아주 공격적인 아이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이는 특히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보호소에 들어오는 여자들이 문제가 있듯 아이들도 문제가 있었다.

17개월 빈이가 소리를 지르면  아이들도 따라서 소리를 질렀고 그게 이를  자극했다.



그 아이들 엄마도 이상했다.

 번은 이가 소리를 지르자 이에게 마구 화를 내며 그만하라고 했는데  말투나 목소리가 너무 공격적이라 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여자도 이에게 질세라 더더욱 화를 했다.



나는  여자에게 그만하라 하고 아이를 안고 나와 노래를 불러줬고 이는 이내 잠잠해졌다.

그 여자는 나더러 아이에게 더 단호하게 교육을 하라고 했다.



하루 종일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느라 애들은 안중에도 없고,

저녁이면 티브이를 보며 쩝쩝쩝쩝 치킨을 먹고,

앉은자리에 뼈를 그대로 놓고 올라가 버리는,

엄마 사랑을 못 받아서 다정하게 웃어주는 나만 보면 먹을 걸 달라고 쫓아다니는 아들을 둔,

아이들이 예절이 없으니 좀 교육 좀 시키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 볼 때 때리고 바닥으로 밀치는,



그런 여자가 나더러 아이를 단호하게 교육하라고 했다.









이가 보호소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 나는  넓은 바닥 곳곳을  그림을 따라 걸레질을 해서 지워야 하고,

방금 목욕시킨 이가 모래밭에 들어가 놀면 나는 다시 옷을 벗기고 씻기고  옷을 입혀야 하고,

끊임없이 냉장고를 못 만지게, 컵을 못 만지게, 음식들을 쏟지 않게 아이를 제지해야 하고,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 이사를 가려면 세간을 마련해야겠기야 인터넷으로 중고가구들도 목록별로 검색하고 판매자와 연락처를 주고받고, 만날 시간을 잡아야 하고, 가구를 실어 올 울리와도 시간을 맞춰야 하고..

그런 것들을 잠깐만 하고 있다 보면 이는 어김없이 쏟고, 깨고, 부수고, 찢고, 적시고, 던지고, 다치고, 울고...

끊임없는 제지에 자기도 화가 나니 하루 종일 울고 소리를 지르고...




이를 안 닦으려고 고개를 돌리다 머리로 내 가슴팍과 턱을 때리고, 기저귀를 갈 때면 발길질에 온 몸을 채이고, 몸을 틀면 똥이 사방에 묻으니 발을 더 꽉 잡을 수밖에 없는데 이 녀석 바둥거리는 힘을 감당할 수도 없고..



아이가 안아달라고 하는 것도 더 이상 예쁘지 않았다.

새로운 말을 해도 사랑스럽지 않고, 예쁜 짓을 해도 예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아이를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달래고 뽀뽀를 할 수 없었다.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이미 오래였다.









정말 미칠 뻔했던 날이 있었다.

한창 사고를 치던 이가 조용해서 보니  지갑에서 남편 사진을 꺼내 뽀뽀를 하고 아빠 아빠를 찾고 있었다.

그 사진을 뺐었더니 나더러 다시 내놓으라고 울고 불고 소리를 지르며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급기야 나를 때리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화가 나서 아이 등짝을 찰싹 때렸다.



이는 목이 찢어져라 악을 쓰고    울었다.

그러고는 울음을 뚝 그치고 딴짓을 하더니 어기적 어기적 나에게로 다가와 팔을 벌리고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자기도 아는 것이다.



엄마가 나를 공격했다는 걸.

그리고 엄마 표정을 보아하니 울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내가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싫어하는 울음을 뚝 그치고 다가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안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하...



저 쪼그만 게 벌써 내 마음을 다 읽고 미움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도 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를 끌어안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정말..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2주였다.

사람이.. 왜 미치는지 알 것 같았다.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드니 돌아버리는 것이다.



남편이 나와 이를 한국으로 쫓아버린 4 12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마음이 편안한 적이 없었다.

특히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며 보호소로 들어온 6월 23일 이후로 나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나는 지난 두 달간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나 많은 상처와 충격을 받았다.

다만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실감도   났고, 그보다  중요한  이와 당장 하루하루 끼니를 챙겨 먹고,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게 상처였다는  깨닫지조차 못하고 과도하게 씩씩하게 지냈던 것이다.



사람이 한 대 빵 얻어맞고 나면 그날 저녁에는 당장 아픈 줄을 모른다.

다음날 일어나면 얼굴은 이만큼 부어있고 욱신욱신 아파 죽는 것이다.

나는 요 2주간의 시간이 그랬다.



뜨거운 여름 내내 방방 거리고 돌아다니며  길을 모색하다 이제 집을 구하고 한시름 놓이니, 마음에   공간이 생겨 눈물이라는 것도 나고,  눈물이 나다 보니 그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고, 내가 어떤 일을 겪은 것인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앞으로 해야  일들이 무엇인지,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정말 정신이 아득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 새끼가 너무너무 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와 살아가기 위해 발악을 하며 24시간 빈이를 돌봐가며 살길을 찾고 있는데, 그게 너무 버거워 이제 나는  새끼가 예쁘기는커녕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이 팔을 잡아끌고, 아이를 함부로 다루는 엄마가 되었다.


 

우리를 죽으라고 길거리에 내버리고 혼자 살겠다며 도망간 건 그 새끼이고, 아이와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건 나인데, 그런데 내 아이는 그런 아빠를 그리워하고 나는 도리어 매일같이 내가 얼마나 못되고 나쁜 엄마인지를 매 순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아이를 버리고 간 건 그 새끼이고, 아이를 곁에서 지키고 있는 건 나인데...

왜 내가 이런 나쁜 엄마가 되어야 하지?



게다가 그렇게 사랑스럽던 내 아이는 어디로 가고, 정말 미친 아이처럼 악을 쓰고 침을 뱉고 온 몸으로 분을, 화를 내쏟는 아이가 내 귀청을 찢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급기야는 멍해지며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몸도 떨리고 이도 떨리고...

치가 떨리는 것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게 다 싫었다.

독일 하늘도 싫고, 독일 땅도 싫고, 독일 사람도 싫고, 독일어도 싫고, 모든 게 싫었다.



다 싫었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자 엄마는 9월 말 티켓을 취소하고 8월 말 티켓을 끊었다.

3주 예정이었던 방문도 한 달 반으로 기간을 늘렸다.

내 정신상태는 도움이 필요했다.



가파른 산을 오를 때는 이게 얼마나 높은 산인지, 얼마나 가파른지 모르고 막 오르다가, 한참을 올라온 뒤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그 아찔함.



다리가 후덜 거리고 너무나 무서운데 이미 너무 많이 올라와서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어찌 됐든 아무리 무서워도 이 악물로 끝까지 올라가야 하는 상황..



그래서 산 중턱에 매달려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너무나 두려운 그런 상태.

그게 지금 내 상태 같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어쩔 줄 모르겠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날,

나는 엄마에게 나랑 이를 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한국 들어갈  나랑 이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제발 우리 버리고 가지 말라고...

나는 정말 간절하게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가 곧 올 거라는 그 사실 하나에 정신줄을 꼭 묶어놓고,

엄마가 오면 엄마 품에 안겨서 실컷 울고, 엄마가 내 눈물 콧물도 닦아줄 거고,

엄마가 차려준 밥 배불리 먹고 목욕도 하고 잠도 실컷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나는 정말 정말 죽고 싶었던 밤 하나를 잘 넘겼다.



잠든 아이를 눕혀놓고..

울고 또 울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밥을 먹다가도 울었고, 길을 걷다가도 울었고, 가만히 앉아서 울다가, 누워서 울다가, 아이를 안고 울다가, 흐느끼며 울다가, 꺽꺽 거리며 울다가...



이는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눈에서 물이 자꾸 떨어지니 신기했나 보다.



그런 이의 작은 손바닥이 가슴 아파서 나는  울었다.

이를 보면 그렇다.



누가 꼭 내 심장을 터지라고 꼭 쥐는 것처럼 그렇게 아프다.

어떻게 이렇게 아리고 아플 수가 있는지..



나는 꼭 고문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사랑하는 내 자식이 아빠를 매일같이 그리워하고 찾는데 아빠는 만나주지 않고, 그런 아이를 보면서 나는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슴을 찢는 고통을 느낀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사지를 꽁꽁 묶고 머리끄덩이를 잡아다 질질 끌어서 빈이 앞에다 데려다 놓고 싶다.

보고 싶은 아빠 실컷 만지고 살도 부비라고...



그런데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자식을 죽이고 싶다.

칼로 수십 번은 찔러 죽이고 싶다.

그 자식이 죽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죽어버리면 차라리 이에게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너를 많이 사랑했다고, 지금도   곁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고 너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거라고" 거짓말이라도 실컷 해줄  있으니까..









다들 그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 젊으니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모든 남자가 니 남편처럼 나쁜 건 아니라고.



나도 처음에 별거를 시작할 때는 그랬다.

마음 닫지 말아야지.

씩씩하게 이겨내야지.



그런데,

그런 게 있다.



사람이 너무 호되게 당하면... 마음을 열고 닫고 가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냥 끝이다.

그걸로 끝.



내가 사랑에 얼마나 용감한 여자인지는 나의 오랜 지인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니 그 어린 나이에 덥석 사랑에 빠져 두 달 만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겠지.



그런 내가 이제는 점점 남자가 무서워진다.

길거리에서 스치는 남자들도 싫고, 상냥한 남자들도 싫고, 남자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고,

누군가와 다시 뭔가를 시작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특히 독일 남자들, 정말 싫고 무섭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실감할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으로 인해 나와 이는 생존권을 위협받았다.

그런 위험천만한 일,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아무도 다시는 우리의 공간에, 우리의 삶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싶지 않다.



새로운 사랑은커녕...

오만정이 떨어진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발 붙이고 살며 독일 사람들과 섞여야 한다는 것 자체도 지금은 고역이다.





*표지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Traurige Frau"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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