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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May 15. 2021

토끼아줌마, 주방과 바닥을 가져다주다!

"WeisserRing"이라는 구호단체의 도움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은 나는 7일 금요일 날이 밝자마자 내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지금 내가 처한 금전적 문제 상황을 빠르게 보고하고 질문을 했다.



1. 남편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도 되는가?


- Ok



2. 남편에게 주방과 바닥공사 비용을 강제로 지불하게 할 수 있는가?


- 남편으로부터 Unterhalten(생계부양)을 받고 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그 돈 안에서 해결해야 함 (내가 이해하기로는..)



3. 남편 회사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는가?


- 상관없음.



4. 남편이 상사와 바람이 났다는 걸 남편 동료들에게 알려도 되는가?


- 절대 안 됨. 만약 회사로 찾아가 남편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패를 부릴 시에는 남편으로부터 지원이 끊길 수도 있기 때문에 남편의 사생활을 고자질한다거나 하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됨. 아주 위험함. (역시 내가 이해하기로..)



5. 남편과 남편의 상간녀인 상사보다 더 높은 책임자를 만나도 되는가?


- 왜 만나려고 하는가?



6. 남편이 지난 반년 간 남보다 2시간 먼저 출근, 2시간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하며 무보수라고 했는데, 한 달이면 100시간을 정말 무보수로 초과근무를 했는지 알고 싶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별 관심 없지만, 인사과에 찌르는 대신 탑 책임자에게 그 얘기를 꺼내며 자연스레 그들의 불륜 사실을 대화의 화제로 삼고자 찾아낸 명분일 뿐.. 지난날 나는 남편의 그 말을 믿었지만, 무보수 매달 100시간이 말이 되나.)


- 남편의 근무기록 사본은 이미 나에게 있다. 내가 알려주마.

별거 전에는 한 달에 160시간, 별거 이후에는 174시간 근무 중이다. 쉽게 말해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돈 벌고 있으니 당신에게도 더 좋은 일이다.


남편을 내버려 둬라.









어찌나 깔끔하게 정리를 하시는지..

특히 내 변호사는, 4번 항목에서 아주 강한 어조로 절대 안 된다며 Dürfen Sie nicht를 여러 번 말했다.



내가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매번 변호사와 얘기를 하고 나면, 이 여자가 내 변호사인지 남편 변호사인지 항상 헷갈린다. 훔...

결국 찾아갈 필요 없다는 말이다.


 

지 새끼랑 길바닥에 나앉는 마누라가 돈 백 얼마 가져간다고 고소하겠다고 으름장 놓고 결국 돌려받아낸 인간이 바닥이랑 주방 살 돈을 퍽도 내어줄 리가..



개새끼.



아... 정말 앞이 막막했다.



나는 보호소  사무실로 가서 베트로이어린 중에  명인 Be에게  상황을 말했다.

나는 정말 방법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Be 나에게 도움이  만한 지원처를 찾아주겠다며 커다란 장부를 꺼내서 여러 가지 이름표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불렀다.



이름이 토끼라며  손으로 깡총깡총 토끼귀를 만들어 보이더니 연락처를 하나 주었다.

이 아줌마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걸었다.

아주 상냥한 목소리의 아줌마가 전화를 받았고,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오늘 당장 만나자고 했다, 서너 시간 뒤인 1시쯤.



어디서 만나는지도 모르고, 이따가 다시 연락을 주겠다기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집안일과 빈이 뒤치다꺼리 끝에 점심을 만들어서 막 먹으려는 찰나, 토끼 아줌마가 보호소 문을 열고 등장했다.



짜잔~~



단발머리를 한 중년의 토끼 아줌마는 상냥한 목소리만큼이나 귀여운 얼굴이었다.



아주 다정하게 잠깐이면 된다기에 스파게티를 내버려 두고, 이는 Be에게 맡기고 그녀를 따라갔다.

명함을 받고 보니 정말 토끼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이었다.

흰말 궁둥이나 백말 엉덩이나.



아무튼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토끼 아줌마는 하얀 고리라는 뜻의 "바이써링(Weisser Ring)"에서 나왔다고 했다.

나에 대한 신원을 기록해 서류를 작성하고는,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도움과 보호소에 들어오게 된 사연을 묻고 아주 다정다감하게(그러나 너무 다정해서 오히려 더 형식적으로 느껴졌던) 위로를 해줬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바닥과 주방 사는 걸 도와주겠다며, 두 가지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하나는, 심리상담 관련.

 하나는, 중고매장 사장님 전화번호였다.



갑자기 이런 상황에 처해서 분명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 테니  심리상담을 받기를 권유한다고 했고, 자기는 바이써링에서 나온 중간 연결 자일뿐이며 중고매장 사장님이 실제로 나에게 주방과 바닥을 해줄 사람이니  사람에게 연락해서 스케줄을 잡으라고 했다.



나는 바이써링이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린피스와 같은 일종의 구호단체라고 했다.



지금 사전을 찾아보니,


Kriminalität 범죄현상

opfern 희생으로 바치다



아마도, 가정폭력 같은 범죄의 희생자들을 돕는 단체 같았다.

팸플릿 표지에도 얼굴에 멍이 든 채 슬픈 표정의 여자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토끼 아줌마는 나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면서.



예를 들어, 생활비가 안 들어왔을 때 암트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재촉을 할 수도 있고,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도 그렇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았지만, 토끼 아줌마의 등장은 정말로 달빛 하나 없는 밤길을 걷던 나에게 갑자기 터진 조명탄처럼 감동이었다.

밤새 한 마음고생이 하루 만에 사라지면서 눈물이 터졌다.



아줌마는 역시나 서류를 작성하며 곁눈질로 내가 울걸 알아차렸는지 나를 쳐다보지 않고도 이미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 행동이 너무 다정하면서도 다분히 형식적이라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묘한 사람이었다.

나쁜 뜻이 아니라 정말로 경쾌하고 상냥하고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데, 그런데 형식적인 느낌이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상대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또 엄청난 쓰나미가 지나갔다.










앨리스는 토끼 아저씨가 이상한 나라로 데려다주었지만, 나는 토끼 아줌마가 주방과 바닥을 가져다주었다.



볼수록 사랑스럽고 기분이 좋아지는 성이다.

한국에도 이런 성씨가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훗.




바이써링 단체 40주년 홍보사진. 사진 속 굵은 글씨로 쓰인 문장의 뜻은 "피해자가 혼자이지 않도록. 당신도 도우세요!"





*표지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검색어 "Traurige Frau"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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