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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May 15. 2021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식사

중고 매장 사장님과의 만남

오전 10시에 새집 열쇠를 받고, 오후 1시에는 토끼 아줌마가 연결해  중고매장 사장님 만나 주방과 바닥에 대한 계획도 짜고 중고가구들도 함께 보기로 했다.



새집 열쇠를 받고, 집 상태를 점검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난 뒤, 방마다 돌아다니며 가로, 세로 치수를 쟀다.

가구를 사서 들이려면 치수가 필요하니까.



글로 쓰니 간단하지만 16개월짜리 개구쟁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방 3개, 주방, 화장실, 복도 치수를 재기란...



이는 과자를 달라며 떼를 썼고, 내가 자를 펼쳐 치수를  때마다 따라다니며 자를 밟고 좋아했다.

남한테 빌려온 자라서 이가 밟을 때마다 부러질까  조마조마했다.



게다가 치수를 재려면  뼘짜리 자를 계속 지그재그로 열어가며 길게 펼쳐야 하는데 처음 써보는 독일식 자에, 이는 재밌다고 깔깔거리며 자를 밟아대는데... ...



이랑 그렇게 씨름해가며  치수를  재고 나니 11시를 훌쩍 넘어 12시가  돼가고 있었다.

아침도 제대로  먹고 나와 배가 고팠지만, 1시에 그 사장님을 만나려면 시간이 없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집에서 화장실 들렸다 나오는 것도 잊어버려 1층 공동현관문을 나서 한숨 돌리고 나서야 화장실이 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 올라갈 수도 없었다.



비좁은 현관문을 열고 다시 유모차를 지하실 계단 밑에 내려놓고 이를 안고 다시 3층을 올라가  일을 보고 내려와 지하실에서 다시 유모차를 끌고 나올 체력적, 시간적 여유도 이미 내게는 없었으니..



게다가 밥 사 먹을 돈도 없었다.



돈 얘기는 곧 하겠지만, 이번 주 수, 목, 금 3일은 정말 최악의 날이었다.

차도 없이 땡볕에 16개월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내 맨 몸 하나로 시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일을 보는 나였다.



 보기만도 힘든데  와중에  먹이고, 똥기저귀 갈고, 울고 짜증 내는  달래가며...



아... 힘들었다.









아무튼, 급한 화장실도 제치고 우반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가서 도착한 그곳은 그 사장님의 중고매장회사.



평범한 중고매장 사장님인 줄 알았더니, 나를 맞이한 직원은 큰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꼬불꼬불 복도를 지나 조그만 사무실 한 편으로 나를 안내했다.



50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아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내가 주방 견적을 내기 위해 아침 내내 이와 씨름하며 열심히 적어간  치수를, 그는 필요 없다며 쳐다도 보지 않았다.



노트를 내민 내 손이 민망했다.



그는 나에게,



"아이가 하나 있는 싱글맘이니 잡센터로부터 1,500유로 정도 받을 겁니다. 내가 이 일을 오래 해서 잘 알지요. 그런데, 주방을 하나 설치하려면 중고를 구입해 설치하더라도 1,000유로는 듭니다.


그 말은 남은 500유로로 주방을 제외한 바닥, 냉장고, 세탁기, 옷장, 침대 등 모든 세간을 장만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사날짜가 4일밖에 안 남았다고 했는데 절대 그 안에는 설치가 안됩니다. 아직 중고 주방을 구하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돈을 어디서 받아내느냐 하는 겁니다.


잡센터에 가구 살 돈을 화요일에 신청했다면 아직도 몇 주는 더 걸릴 텐데 돈이 없으면 일도 진행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서 돈 받을 곳을 찾아내야 합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잡센터와 바이써링이 공동 부담을 합니다.


잡센터가 지원을 많이 해주면 바이써링은 상대적으로 적게, 잡센터에서 부족한 예산은 바이써링이 좀 더 해 주는 식으로요. 어느 쪽에서 주방과 바닥에 대한 예산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모른다고 했다.

토끼 아줌마는 바이써링 측에서 주방과 바닥을 설치하도록 도와준다며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실질적으로  일을 진행할 사람이라며 그녀가 나에게 소개해  게 이 사장님이었으니까.



그는 당황하는 나에게,



"아, 걱정할 거 없습니다. 잡센터든 바이써링이든 반드시 둘 중에 하나는 부담을 할 겁니다.

이사 날짜가 당장 이번 주 일요일인데 아이랑 엄마가 바닥도, 주방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잡센터에 연락해서 빨리 돈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면 됩니다.

당신은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듣기에는 참으로 든든한 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분명 1,500유로는 기본 가구 구입비이기 때문에 바닥과 주방에 대한 예산은 포함되지 않은 가격이다.

나는 바이써링 측에서 무료로 주방과 바닥을 보조해주는 줄 알았는데 돈을 받아내야 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가 토끼 아줌마와 이야기하겠다고 하니, 일단 그러마 하기는 했다. 돈에 대한 이야기는 그쯤하고 그는 나를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쾌쾌하게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다양한 중고가구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자, 이게 우리가 가진 중고가구들입니다. 뭐든지 고르세요.

그냥 손가락으로 이거, 이거라고 가리키기만 하면 우리가 바로 실어다 배달해드리고 설치도 해드립니다."



독일은 반제품 가구가 많다.

완제품으로 배달되는 경우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은 반제품으로 분해되어 배달이 오고, 집에서 조립해 사용하는데, 중고로 팔거나 살 때에도 다시 분해를 하고 조립한다.



지금 내 상황에서 가구를 구입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돈도, 시간도 아닌 배달이다.

중고로 저렴한 가구를 산다 한들 집으로 어떻게 가져올 것이며 3층까지 어떻게 올린단 말인가.



그래서 이베이 같은 곳에 양질의 중고가구들이 말도  되게 저렴한 가격에 나와도 사지를 못했는데,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공짜로 배달을 해주고 가구 조립도 해준다고 했다.



 말은, 최대한 이 사장님을 통해 집안 가구를 채우는   입장에서 가장 좋다는 이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가구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너무 낡고, 예쁘지도 않고, 무엇보다 지저분했다.



특히 침대 매트리스절대 그곳에서 사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도 너무 더러웠고, 깨진 곳도 있었다.



성격 급한 사장님 속도에 맞춰 빠르게 창고를 훑었고, 나는 밝은 갈색의 가벼워 보이는 거실  세트와  키에 맞는 크지 않은 옷장, 그리고 목재 서랍장 하나를 골랐다.

그 안에서 그나마 제일 예쁘고 깔끔했다.






새 것처럼 보이는 자전거도 두대가 있었는데 그것도 가져도 된다고 해서 나는 자전거도 하나 골랐다.

바퀴가 얼마나 큰지 내 허리를 훌쩍 넘어 보였지만, 독일에서는 아이들도, 여자들도 보통 이런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에  몸에 비해   아니냐고 걱정을 했더니, 그는  자전거가 여성용이고 안장을 낮추면 된다고 했다.



독일에서는 성인용 자전거 뒤에 안전벨트가 있는 시트를 장착한 뒤 어린아이들에게 헬멧을 씌워 태우고 다닌다.

유치원도 데려다주고 장도 보고 그렇게 산책도 한다.



이가 뒤에 타면 무겁기야 하겠지만  연습하면 되니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자전거도 사려면 가격대가 만만치 않은데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보자 싶었다.









창고를  둘러본   회사 건물 밖에 있는 컨테이너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는 정말로 중고매장인데 가격대가 상당히 높지만 한번 구경 정도는 해볼 만할 거라며 가보라고 했다.



자기는 일이 너무 바빠서 주말이나 돼야 시간이 나니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언제든 가구에 관해 내가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했다.



그럼 자기가 차러 데리러 가서 같이 가구도 봐주고 옮겨주고 하겠다고.

일단 토요일에 자기가 다시 연락할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고맙기야 하지만 금요일만 돼도 칼퇴근을 하는 독일에서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일을 하다니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30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부부의 청소년 딸을 도와주러 자기는 2시까지  동네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헉...

알면 알수록 놀랍다.



처음에 나는 그냥 맨 몸으로 쫓겨나 자립을 하는 중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다 보니 내가 받는 도움들은 정말 평범한 수준의 도움이 아니었다.

저렇게 잔인한 범죄의 희생양들과 같은 수준의 도움을 정부와 사회기관으로부터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토끼 아줌마가 준 명함에 적인 바이써링 심벌과 그 밑에 적힌 문구가 이해가 갔다.



나는 지금 독일에서 정말 Notfall (위급한 경우, 비상시)인 것이다.



파란만장하다.



일이 급한 사장님과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나와, 중고 매장에서 8유로 정도를 주고 나무 장바구니, 미니 광주리  , 문에 거는 장식품 하나, 초로 냄비를 데울  있는 냄비받침, 꽃병을 사서 대로변으로 나와 30분에 한대가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다시 우반을 갈아탄  중앙역에서 내려 15분을 걸어 보호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3시가 다되었다.



아침 9시부터 지금까지.. 방광이 터지는 줄 알았다.

빈이를 뒷마당에 내팽개치고 땀에 범벅이 된 몸으로 2층 화장실로 뛰어올라갔다.



그 사이 아이는 엄마를 찾아 울었고 나는 볼 일을 보자마자 땀을 닦을 틈도 없이 다시 뒷마당으로 뛰어내려 가 아기를 안았다.

기저귀가 얼마나 묵직하던지...



생각해보니 나만   보는  잊어버린  아니라  기저귀 갈아주는 것도 깜빡했다.

이도 6시간을 같은 기저귀를   유모차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내 새끼...



기저귀 갈기 싫다고 버티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서 눕혀 발버둥 치는 발에 배와 가슴을 채여가며 겨우 기저귀를 갈고 났더니..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그런데 가구 구입비에 대해서 G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시간이 나면 G가 시간이 안되고, G 시간이 되면 내가 바빴다.

G는 4시면 퇴근을 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그녀와 대화를 해야만 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먹으면서 얘기를 나눠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했다.



하루 종일 유모차에 누워 고생스러웠는지 빈이가 유난히 안아달라고 징징거렸고, 나는 우는 아이를 안고 땀범벅인 채로 주방에 서서 라면을 끓이며 G 대화했다.









문제가 심각했다.



지난 일주일간 보호소  나의 담당자인 G 휴가를 갔는데  사이 내가 집을 얻어버린 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열쇠를 받고, 잡센터에 월세와 가구 구입비를 신청하는 등의 중요한 사안이 너무 많이 진행이 되어버렸는데 그녀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했다.



자기는 내가 토끼 아줌마와 사장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일을 진행하기로 했는지도 전혀 모르며, 잡센터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예산을 신청했는지도 모르는 데다 안다고 해도 자기가 도와줄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했다.



헉.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일단 나는 가장 중요한 돈과 날짜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Bb 통해서 잡센터에 가장 기본적인 가구 구입비 신청을 화요일에 마친 상태예요.  돈에는 주방과 바닥이 포함되지 않은 가격인데, 나는 주방과 바닥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이써링 측에서 도와주기로 했구요.


그래서 오늘 바이써링에서 연결해  중고매장 사장님과 만나서 기본적인 계획을 짰어요. 아직은 정확히   없지만 주말 중에 다시 사장님을 만나 얘기하기로 했어요."



G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불어 터진 라면에 빵아침 겸 점심 겸 저녁으로 때우며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는 기력이 넘쳤고, 방으로 올라와서도 나에게  틈을 주지 않고  복도를, 소리를 질러대며 돌아다니고 냉장고를 열어 계란들을 깨고  방을 헤집어 놓았다.



하...



너무 덥고 힘들어서 짜증이 났다.



한계가 온 것 같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냉장고 앞에 앉아 정신이 나간 얼굴로 이가  놓은 계란 6개를 닦아내고 있는데 옆방 P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너 많이 힘들어 보인다. 내가 아기랑 산책 좀 나갔다 올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너무너무 고맙다고 했고, 그녀 덕에 2시간 정도를 빈이 없이 처음으로 보호소에서   있었다.

물론 목욕도 했다.



너무나 힘들었던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물었다.



집 얘기 만으로도 포스팅할 게 너무 많아서 보호소 생활에 대해서는 쓸 정신이 없지만 보호소에서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이번 주말에 다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표지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검색어 "Traurige Frau"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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