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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May 28. 2023

비가 내리면 좋겠다

(너무 많이는 말고)

비가 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쉬는 날이다.


맑은 날의 하늘은 감동적일 정도로 청록색이다. 그리고 해 질 녘이 되면 태양의 붉은색이 하늘에 번지기 시작 한다. 떠다니던 구름들은 전략적으로 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빛을 내리쬔다. 수평선에 해가 걸리는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마법처럼) 아름다웠으면 매직아워(Magic Hour)라는 호칭을 붙였을까.

이런 날 내가 사진을 찍지 않고 있다면 초조하고 불안하다. 기록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것 같다. 그 순간을 담지 못하면 죄책감이 그날 하루를 지배한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의무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직업 만족도는 누구보다 좋지만 의무감에 사로잡히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의무감에서 해방된다. 그냥 멍하게 창문에 튀는 빗소리를 듣는다. 물길을 내고 주르륵 흐르는 빗물을 한참 쳐다보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근심걱정 없던 어린 시절 외갓집 흙마당에 떨어지던 빗방울도 생각난다.


비 오는 날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사울레이터 흉내를 내본다. 이 사진이 어딘가에 쓰일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해방된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다. 처음 카메라를 잡던 때가 생각나고, 상대방이 원하는 사진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고 있음을 느낀다.

비가 오면 쉰다는 건 단순히 몸이 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신적인 해방이 더 큰 쉼이었다. 차도 막히고, 습하고, 빨래도 잘 안 마른다. 배달도 늦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쉼이다.

비가 그치면 대체로 맑은 하늘이 펼쳐진다. 그리고 난 다시 의무감에 카메라를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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