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성 탐방로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사진을 찍으러 나오지 않은 것은 사진가로서 자격 미달이다’
사진을 처음 배우던 시절, 선생님이 현장 촬영 실습 시간에 결석한 학생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날은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대중교통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집이 먼 동기들이 오지 못하는 상황이 충분히 이해됐다. 게다가 불금 다음날인 토요일 아침이었으니 오죽했을까.
그로부터 15년. 눈이 펑펑 쏟아지면 그때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메고 밖으로 나간다.
이날도 눈이 많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전날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여니 온 세상이 하얗게 겨울왕국처럼 바뀌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년에 눈이 애매하게 내려 아쉬웠던 촬영지 중에 하나를 골랐다. 인천 계양산에 있는 계양산성 탐방로다. 눈이 오면 이곳을 꼭 찾는다.
등산로 초입은 이미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길을 닦아 둔 탓에 돌계단이 드러나 있었다. 나뭇가지에 엉겨 붙은 눈뭉치들은 무게를 못 견디고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미끄러지기 라도 하면 경제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으니 최대한 조심해서 올라갔다.(내려올 때는 더 조심해야 한다) 숨을 헐떡이다 어느새 우거진 나무숲이 아래로 내려다 보일 만큼 올라갔다. 헉헉 거리며 하늘과 땅만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 계단을 밟는다. 머리를 빼꼼 내미는 듯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넓게 펼쳐진 설원이 눈앞을 환하게 밝힌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계양산성 탐방로 팻말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산 중턱에 만들어진 또 다른 작은 언덕 같은 곳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되었다가 지금은 소실된 성곽의 흔적을 따라 공원으로 조성한 것. 날씨가 좋은 날 조금 더 올라가서 동쪽을 바라보면 북한산이 장엄하게 시야를 사로잡는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면 서울의 남산타워와 롯데월드타워가 대치하듯 서있다. 그리고 그 앞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게 보인다. 과거에 봉화를 피우면 어디까지 보였을지 짐작이 갈 정도다.
그날 여기에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와’ 소리를 냈다. 아이들은 눈싸움에 진심이었고, 어른들은 경치를 휴대폰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치 흰색 천으로 덮은 듯, 눈이 지표면 위로 매끈하게 쌓여 있었다. 언덕 굴곡의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산책로는 이미 수많은 등산객들에 의해 눈이 녹아 사라지고 진흙으로 변해 있었지만, 아직 밟히지 않은 길에서는 첫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눈밭은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들리고, 발목을 넘길 정도로 깊이 파였다. 주변이 온통 하얀 곳까지 가니 입체감이 없는 탓에 원근감을 상실당할 정도였다. 오랜만의 설경이었다. 다른 장소도 가보고 싶었지만 몸이 하나라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15년 전 선생님이 한 말에 최면이 걸린 것 같다. 겨울에 눈만 오면 밖으로 나가려 안달이 난다. 이번 겨울엔 눈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마저 있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그것도 하필 겨울이 다 끝나가는 무렵에 눈을 이렇게 뿌려 주시니 어떻게 안 나가고 배길 수 있는가.
어쨌든 겨울 사진은 미련 없이 찍었고, 이제 곧 봄이다. 그리고 봄에는 벚꽃 사냥을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