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도에 백패커들의 성지가 있다며 사진 촬영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지도로 검색해 보니 나오지도 않는 곳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의뢰인들에게 물어보면 자기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책상에 앉아 검색만 하기 때문이다. 현장엔 가보지도 않고 통보하는 식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확한 위치를 요청했더니 역시나 모른단다. 모험은 나의 몫이니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보기로 한다. 무의도는 자주 가본 곳이다. 하지만 백패커들이 올린 블로그를 보니 이곳은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다들 무의도 광명항에 차를 대고 올라갔다는 기록을 보고 일단 네비를 찍었다.
무의도 광명항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아스팔트의 열기가 회오리 치며 올라오는 듯했다.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이렇게 덥다니. 근처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고 사장님께 여기에 ‘무의도 세렝게티’라고 불리는 곳을 아시는지 물었다. 최근에 유명해진 탓에 사람들이 자주 왔었는지 잘 알고 계셨다. 어떻게 가는지 물으니 옆에 있는 카페 뒤 산길로 올라가라며 알려주셨다.
생수를 카메라 배낭 한구석에 쑤셔 넣었다. 신발끈을 한번 더 조인 다음 천천히 길을 나셨다. 산이 높지도 않고 편도 1시간 거리라고 해서 힘들진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길이 험하진 않았지만 등산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정표도 없었다.(어떤 백패커가 직접 만들어 놓았다고 들었는데 보지 못했다. 아마도 며칠 전 폭우에 쓸려간 것이 아닐까.) 그냥 사람들이 오며 가며 생겨난 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의 갈림길이 있었지만 다행히 헷갈릴 정도는 아니었다.
높지 않은 산을 하나 넘으면 바다가 나온다. 여기서 물때에 따라 해안길과 산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마침 간조라 해안길을 선택했다. 산을 다시 오르는 게 싫어서 선택했지만 그 길 또한 쉽지 않았다.
자갈과 모래가 적당히 섞인 해안길을 따라 이동했다. 푹푹 꺼지는 발을 힘겹게 들어 올려야 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산길을 선택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하다 보니 어느새 2/3 지점인 ‘지옥문’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백패커들이 붙인 별명이다. 간조 때 해안길로 가야만 여기를 지날 수 있다. 넘기 힘들어 보이는 커다란 바위 가운데에 U자 모양으로 길이 나있어 붙은 별명인 듯하다. 사전 조사를 할 때 수많은 백패커들이 여기서 인증샷을 남긴 걸 봤다. 익숙한 풍경이 나오니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즐거워 보이는 인증샷과 달리 이 ‘지옥문’은 이름처럼 위험했다. 여길 건너다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정말 지옥으로 갈 것 같았다. 혼자 왔는데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될지... 두 시간 뒤면 만조인데 그때까지 고립되면 오도 가도 못한 채 지옥행이다. 추락주의 표지판이 살벌해 보였다.
무사히 지옥문을 지나면 바위 위로 이리저리 뛰면서 이동해야 한다.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고관절에 잔뜩 힘을 주고 이동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갯강구 수십 마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밟지 않으려다 내가 다칠 수도 있어서 그냥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갯강구들은 바퀴벌레 같은 속도로 머리 위에서 운석처럼 떨어지는 내 발바닥을 이리저리 아주 잘 피해 갔다.
바위가 끝나고 다시 해안길을 지나면 작은 숲길이 나온다. 숲길이 끝나면 웅장한 절벽과 그 아래 너른 평지가 세렝게티처럼 펼쳐진다. 이곳이 목적지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의도'와 '세렝게티'를 합쳐 백패커들의 새롭게 떠오르는 성지 '무렝게티'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과거에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거대한 바위가 깎인 흔적이 산 한 면에 절벽 형태로 남아있다. 그 앞에 자리한 널찍한 터. 아마도 과거에 채석장이 운영될 때 만들어진 터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유로 채석장이 더 이상 운영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이 터만큼 산 한쪽면이 사라진 것일까. 나지막하지만 풍성하게 자란 초목들이 제법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말이 되면 텐트 칠 장소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지도에 길도 나와있지 않은데 어떻게 다들 알고 오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한두 무리의 백패커들이 텐트를 치고 자리 잡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있길래 반가움에 인사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알고 보니 사진 촬영을 위해 자주 이곳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분은 씁쓸한 표정으로 올해 초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오는 장소가 아니었다고 한다. 표정의 의미는 아마도 ‘나만 아는 공간’에서 ‘누구나 아는 공간’으로 바뀐 것에 대한 불만 일테다. 블로그나 SNS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백패커들이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백패커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초보들이 접근하기 쉬운 코스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했다.('초보 코스‘라는 단어를 듣고는 최대한 힘든 티를 안 내려 노력했다.)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잠시 앉아 생수로 목을 축이며 해 질 녘 골든타임을 기다렸다. 숨을 가다듬고 바닷가를 보니 멀리 육지가 보인다. 위치상 대부도와 영흥도가 아닐까 싶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 깎여진 절벽을 보았다.
'산사태가 나지는 않겠지…’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하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땀에 젖은 옷이 말라가는 사이 빛이 옆에서 아름답게 들어오기 시작함을 느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또 한 무리의 백패커들이 경치를 감탄하며 들어왔다.
짧은 골든타임 동안의 촬영을 마치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나섰다. 갯강구들이 바글거리던 해안길은 물에 잠겨 있었다.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하다가 저 멀리 해안 끝에서 누군가 산길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력이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얼마 후 따라잡았는데 알고 보니 좀 전에 대화를 나눴던 사진가였다. 해가 지고 산길에서 길을 잃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터라 감사한 마음에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다시 한번 1시간을 산 넘고 물 건너 광명항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선에 가지런히 주차된 내 차가 어찌나 반갑던지. 밤이 되었는데도 시원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음에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며 시동을 걸었다.
아마 사진은 한 장 정도 쓰일 것이다. 헛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