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숨은 노랫소리

Morocco Diary / Asilah > Tanger

by 이인

탕제(Tánger)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꽤 거리가 있어서인지 지금껏 여러 번 기차를 타봤지만 객실로 나눠진 칸에 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설렜다. 그간 라밧(Rabat)에서의 시간이 여행이라기 보단 생활에 가까운 날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걱정들이 뒤죽박죽 섞이긴 했어도 오래간만에 낯선 곳으로 간다는 사실에 나는 설렜다. 그렇게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동안 탕제를 향해 달리던 기차 밖의 표정은 어느새 확연히 달라져 있었고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대평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수십 마리의 양 떼가 부지런히 떼 지어가는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 삼아 잠시 정차하고 있을 때였다. 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두 소년이 순식간에 혼자 있던 객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딱 보기에도 무임승차인 것 같던 남루한 옷차림의 두 소년은 내 눈을 보며 '아팍, 아팍' (모로코어로 '부탁입니다'라는 뜻)을 연발하더니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상황을 판단할 겨를도 주지 않고 내가 앉아 있던 그리고 맞은편의 의자 아래로 한 명씩 나눠 굴러들어가더니 바닥에 납작하게 배를 깔고 누웠다. 체구가 작은 쪽이 간간이 '호야!'(모로코어로 '형'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걸 보니 둘은 형제인듯했다. 기차는 다시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을 내보냈고 얼마 뒤 나이 지긋한 한 승무원은 객실 내에 '혼자' 앉아있는 이 동양의 아가씨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납작하게 누운 두 소년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 채, 기차는 다시 제 갈 길로 출발했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무슨 연유인지, 측은하기도 하고 또 불안해 보이던 소년들은 내가 건네준 치킨 샌드위치를 덥석 받아먹기도 하고 낮은 소리로 주거니 받거니 노래를 나누어 불렀다. 가사도 음도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웅얼웅얼하던 그 숨은 노랫소리는 어쩌면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법일 거라 생각했다.


기차는 어느새 다음 역에 정차했다. 한 쌍의 부부가 객실로 들어왔고 나는 그렇게 숨은 두 소년들을 포함한 네 명의 손님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부부는 자신들의 발아래에 소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의자 아래의 소년에 맞춰지기도 했지만 그 사실을 알리 없는 부부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창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이 순간이 영화였다면 누군가는 클리셰 같은 장면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기차는 다음 역에서 또 짧게 정차하였고 둘 중 큰 아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어 창 밖의 역 이름을 확인하더니 잽싸게 몸을 빼내 동생과 함께 플랫폼으로 뛰어 나갔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내 앞자리의 부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랍어로 몇 마디를 나누었다. 창 밖을 내다보니, 그 두 소년은 비밀을 지켜주어 고맙다는 듯 손을 흔들고는 차창 뒤로 멀어졌다. 나 역시 그 해맑던 얼굴들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그 아이들의 다음 생은 불안한 무임승차의 삶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 주었다.

탕제(Tánger)로 가는 길에 만난 기차 창밖의 풍경

기차역에는 노먼(Noaman)의 친구인 하산(Hassan)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어준 그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반성했다. 아랍 국가 특유의 연대감 때문인지 이곳에서의 친구의 개념은 우리의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진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도 기독교 혹은 여타 종교와 비슷하게 형제, 자매로 칭하며 서로를 대하는데, 지금까지 모로코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을 지켜보니 그것이 그저 말뿐이 아닌 마음으로, 행동으로 친구를 가족처럼 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나를 도와주러 기꺼이 나와 준 하산(Hassan) 같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한국에서의 내 관계도가 하나하나 떠오르며 그저 그 얇은 관계의 한계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나를, 스페인으로 떠날 때부터 돌아와 아실라에 이틀을 머무는 동안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가이드, 숙소를 찾는 일,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어주는 소소한 일까지 마음을 다해주었다. 내 형제의 친구이니까, 자신의 형제, 자매와 다름없다는 진심 어린 말과 함께.


"You're my brother's sister,

it means you are my sister."


Asilah (아실라)에서 든든한 가이드였던 하산(Hassan)
항구 도시인 Tanger 에는 배를 만드는 곳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모로코 전통 의상인 질레바를 입고 가는 탕제의 할아버지


But life is both a major and a minor key
인생은 장조와 단조, 두 음이 함께인 거야

Just open up the chord
그러니, 화음을 만들어봐

- 'Travis'의 곡 Side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