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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Scent Sep 25. 2021

13. 어둠 속 하이웨이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여러 개인 메두사 같을 때가 있다. 


가끔 책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머릿속을 지배해서 영 시끄러울 때가 있는데 그 럴때면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서 내용물을 탈탈 털어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 것도 한두해 지나다 보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없으면 심심해서라도 스스로 일을 지어내 몸을 가만히 두지를 못한다. 몰라서 그렇지 정신병인 것 같다. 혹자는 진취적이고 용감하다 평하는데 나는 그렇게 말을 지어내 주는 그들이 오히려 신기하다. 


대개의 MBA들은 야간 수업일 확률이 높은데, 학생의 절반 이상이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어디 도서관에서 머리를 파묻고 책을 파고드는 후드티보다는, 기깔나게 빼 입은 양복과 틈 없이 볼륨이 솟아나는 스커트에 구두가 일반적이다. 물론 바로 수업을 들어야 하기에 저녁도 제공하는데 이러한 행보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았다. 단지 나에게서 바뀐 건, 한국에서는 배에 아이를 담고 다녔다가 미국에서는 빼서 함께 다녔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수업은 저녁 6:30에서 늦으면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야 아이를 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니 그저 태동을 느끼거나,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 물을 빼주면 전부였는데 미국에서 아이와 함께 학교 다니기가 영 녹록지가 않았다. 


학생이긴 한데, 직장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선생도 아닌 것이 아이 손을 덜렁 잡고 학교에 들어가는 나의 정체성은 매우 불확실했다. 한국에서 어딜 가도 아싸인 나는 그 튀는 사람 많고 개성 강하다는 미국에서 조차도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 아웃사이더였다. 


똥인지 된장인지, 교수님께 "아줌마"하며 인사하는 아들

불가피하게 아이와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럴 때면 나는 온몸이 배꼽을 기점으로 쪼그라드는 기이한 경험을 하는데, 사전에 교수님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그 시점에 많이 발생했다. 조건은 아이가 수업 중에 방해가 절대 되지 않아야 하며, 모든 학생들의 동의를 구할 것이 그 것이었다. 


그 전제가 나는 말 한마디 알아듣기 힘든 수업보다 더 어려웠다.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몸으로 때워버리는 모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스무 명 남짓되는 동기들 앞에 서는 것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모두가 헉-하는 등록금을 내고 들어오는 곳이었다. 아이가 그 집중력과 열기를 깨뜨리는 순간 나는 망한다. 

한 명 한 명에게 가서 준비한 음료수와 간식을 건네주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나는 너희와 함께 수업을 듣고 싶은데 옆에 아들도 반드시 함께여야 한다. 절대 방해 안 할 테니 수업만 듣게 해 다오'가 요인데. 이 정도면 '맘충 고수 버전'인데 반응이 신기했다. 


동기 한 명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쵸코렛을 꺼내어 아이의 손에 쥐어주지를 않나, 어떤 이는 일부러 밖에 나가 밴딩 머신에서 음료수를 사다 주었다. 한 사람은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어 아이와 스타워즈 검 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아이를 잡아두기 위해 설치해 놓은 노트북에서 아이가 볼만한 동영상을 검색하는 이도 있었다. 자기가 먹을 저녁을 양보해 주는 이도 있었고, 지친 아이가 의자에 기대 자려고 할 때 자기 짐을 치우고 양복을 구겨 베개를 만들어 주는 이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단 30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맙다기보다는 있는 어이가 털려버렸다. 나에게는 바다가 양갈래로 갈리는 것보다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어머나 이 아름다운 세상, 정말 살만하군요.' 라 생각하기보다는 '앞으로 이렇게 아이를 데려올 때마다 과연 너희들이 이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꼬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업 들어가기 전 동기 녀석과 스타워즈 검을 흔드는 아이



얼굴만 발갛게 달아올라 숨만 겨우 쉬면서 나는 아이에게 헤드폰을 끼워주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옆에서 치근덕 거리는 아이 때문에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망할 놈의 파워레인저 

수업이 마냥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는 가운데 흥을 이기지 못한 아이가 갑자기 "꺄아아아아 캬캬캬캬캬 깔깔깔 큭큭큭" 하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랐다가 함께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오줌을 지릴 뻔한 순간이었다. 망할 놈의 파워레인저 파란 놈인가 초록색 놈이 아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모양이었다. 아임 쏘리를 몇 번씩 외치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 

등골이 서늘했다. 



겨우겨우 수업은 진행이 되고, 10시가 넘어갔을 때 아이는 하품을 하며 나에게 안기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펜을 들고 눈은 칠판을 향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엉덩이를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엄마가 눈치를 줬는지 한동안 칭얼거릴 줄 알았던 아이는 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품에서 곤히 고오 소리를 내며 자는 아이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내 팔이 먼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수업을 마치고 가방이랑 짐을 챙기는 데 조용히 교수님이 내 옆에 오셔서 어깨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It's a life. Be brave."

그리고 이후 수업에서도 동기들은 신기하게도 같은 상황에서 언제나 동일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아이고야.. 애 데리고 이게 무슨 생 고생이고'라는 눈치를 받은 적이 없었다. 얼굴색이 다른 것처럼 나는 그저 다른 나라에서 온 동기였고, 아이를 데리고 수업을 듣겠다 한 것도 그들의 시선에서는 그저 다른 직업을 가진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내 선택에 아무런 질문이 없었다. 


배제하기보다는 배려로, 누락시키려 하기보다는 나와 아들을 사진 찍어가 식사자리에서 안주 삼겠다 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실제로 학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로의 다리를 묶고 ,누구 하나 넘어지지 않게 완주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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