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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Scent Oct 01. 2021

14. 망알년

학교 생활은 꾸준히 비어버린 머릿속을 채우고자 했던 본디 목적과는 달리, 빈수레를 더욱더 요란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한다. 희한하게도 넣으면 넣을수록 텅텅 비어 가는 머릿속을 보며 '그냥 가만있을걸' 후회해도 할 수 없는 망상을 일분일초마다 하게 되었다.


알아가는 기쁨이 있기 전에 10분도 수업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는 내 한계치가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았다. 유학 오기 전에 수도 없이 봤던 넷플릭스는 없었다. 교수님의 발음이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옆에 있는 동기들 말이 다 끝난 줄 알았다.(시작도   거였다.) 아니 언제가 수업 시작이고 언제가 과제 제출인지 솔직히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유학은 언감생심 나 같은 망알련에게는 오면 안 되는 곳이었다.


문장의 시작과 끝이 나를 놀려먹고 있을 때쯤, 논리적 사고라고는 약에 쓰려해도 찾을 수 없는 내게 통계가 너는 정말 분수를 알았어야만 했다며 제대로 발길질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유학 준비 기간보다 더 어려울까 싶었던 학교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빅엿'이었다. 해석도 안 되는 데 어떤 통계법을 사용하여 증명하였는지 설명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읍'하고 몸이 안 좋은 척 화장실로 향했다. '아마 나 대신 녹음기가 열일을 하고 있겠지. '


수도꼭지를 열고 벌게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얘는 미친 것 같았다. 일은 벌어졌고, 등록금은 이미 냈고, 도중에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이런 망알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정시킬 수 없는 마음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고, 과제가 뭔지 몰라 손도 못 대는 나는 그냥 동물원 안 원숭이였다. 아는 척 끄덕거리는 고갯짓도 시간이 지나니 할 짓이 아니었다.


그 기간 동안 유일하게 향상된 능력은 '구글 서치' 능력이었던 듯싶다.  나대는 심장을 움켜잡고 녹음기가 저장한 교수님의 강의를 집에 가서 다시 들으며 나는 그렇게 한 마리의 동물이 되어갔다. 울다가, 책상을 쳐대다가, 소리 지르다가, 다시 교재를 펴고 머리를 파묻고 '으-'같은 짧은 괴성을 질러댔다. 남들은 5분도 안 걸리는 코멘트도 나는 한 시간도 넘게 고민을 하고 검토를 해야 달아 놓을 수 있는 숭고함이었다.


그렇게 방에서 한 마리의 동물이 고뇌에 빠져있을 때, 책상 아래 덩그러니 앉아 레고를 하고 있는 아이가 '엄마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라고 물었다. 딴에서는 공부하는 엄마가 나중에 뭐라도 되겠지 싶어 궁금했나 싶어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아이는 대답했다.

"엄마 나는 아무것도 안되고 싶어, 무서워"


그 한마디가 명치를 훅하고 내려 갈겼다.

공부한다고 깝죽거리는 내가 아이는 무서웠던 것이다.


나도 그 누군가처럼 즐겁게 배우는 기쁨에 겨워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머리는 그리 되지 않았다. 공부도 팔자에 있는 사람에야 가능한 것이었나 보다. 저장 능력이 밑바닥을 보이는 아줌마가 도전하기에는 이 깊고 넓은 학문의 세계가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되는 뜨거운 감자 같았다. 그래서 뭔가 대충대충 하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했지만 금세 접었다. 그것도 알아들어야 가능한 요령이었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라기로 했다.


졸업만 하자


낮은 자세로 포복하더라도 도착지까지만 가자.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키워드, 단어, 과제 알아듣기


유리 천장이 반드시 특정 상황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배움에 지쳐갔다.


가끔 웃을 때도 있었는데, 그 마저도 메이저 안의 마이너리티가 그나마 쪽팔리지 않으려고 '행복해 죽겠어요' 라는 표정이라도 지어야 중간은 갈까 해서 짓는 생존의 미소였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라는 노랫말 가사 같은 소리는 오늘만 살 수도 없는 나에게 너무도 가혹한 사치였다.


매 수업 전 불안해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남들이 꿈꾸는 알흠답고 지적인 유학 생활은 그저 꿈으로만 남길 걸 그랬나 보오' 라며 밤마다 수없이 이불을 걷어차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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