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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Scent Dec 31. 2022

17. 옘병

  


일 년 만에 다시 글을 쓰러 들어왔다. 언제나 남이 쓰는 문장에 기대어 쓰지 않으려 기를 쓰고 버티는 게 300일이 하고도 두 달이 넘는 시간이었다.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건 참으로 기똥찬 일이다. 커서가 깜빡이는 동안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는 그 찰나가 내 글이 망해 간다는 뜻이다. 삶이 나를 통하여 글을 써 내려가야만 반드시 부끄럽지 않은 글이 되는데, 독자가 없다는 건 그만큼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나의 두 손은 부드럽게 인생이 이야기하는 자근자근한 소리에 반응한다. 그래도 작은 답글에 '정주행'했다는 혹자의 짤막한 응원은 어쩐지 내 인생이 그 누군가의 결에 맞추어 들어갈 수 있다는 신기한 경험으로 수렴한다. 보통 글은 하루 만에 써지지 않는다.  대개는 낮에 작성이 되고 밤에 들어가 부끄럽지 않음을 확인한 후, 그다음 아침에 수정하고 글에 맞는 사진을 고른 후 모바일 버전으로 두 눈을 확인한다. 그러니 이 골치 아픈 글들은 내내 머릿속을 잠식하다 며칠을 걸쳐 토해내게 되니, 쓰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옘병인지 모른다.


그렇게 '글'은 다시 귀에 대고 이제 돌아왔으니 좀 꺼져줄래 라 한다.

8년이 되어가는 노트북을 켜고 그러니까 5년 전쯤으로 돌아가 본다.


그렇다. 아마 두 눈을 달구는 빨간 여름이었을 것인데. 우여곡절이 참 많은 졸업식이었다. 줄곧 가족은 아들만 등장하는데 이 날도 그랬다. 나의 졸업은 인생사의 획을 그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입학도 기가 막혔지만, 돌고래보다 약간 나은 아이큐로 과제 하나에 13시간을 걸려 겨우겨우 작성하는 내게 졸업 논문이라고 뭐가 달랐겠는가. 하늘이 도운건 맞는데, 솔직히 교수님들도 이 똥은 빨리 치우자 라는 작심에 내린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던가, 그날만큼은 참 불편하고도 후련한 날이었다. 아직도 피트(ft)와 인치(in)를 헛갈리는 사람으로서, 주문한 졸업복이 바닥에 질질 끌려 밟으면 앞으로 꼬꾸라 질만큼 길었다. 하필, 아이는 네댓 살 밖이라 한 손으로는 아이 손을 잡고 한 손은 검정 드레스를 잡듯 스텝을 밟아 기어 들어갔다. 아이 간식과 물통, 혹시나 밖에서 똥오줌을 지릴까 채운 여벌 옷이 터질 듯 들어간 검은색 배낭은 졸업식이라고 네 인생의 무게는 달라질 것이 없다는 듯이 어깨를 짓눌렀다. 학교를 배경으로 찍는 개인 졸업사진은 참, 어마어마했다. 아들은 앞에서 촐싹대며 이미 본인이 주인공이었고, 나는 그 동체를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는 학사모가 떨어질세라 승모근으로 바닥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웃었고, 나는 웃지 않았다. 대사를 치른 후 들어간 대학교 중앙 실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펼쳐진 졸업식 의자에는 오롯이 졸업자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땅꼬마 아들은 어디엔가 두고 가야 하는 기가 막힌 상황에서 잠시 당황했다. 남들이야 졸업식이라고 타 주에서 부모님들이 오시고, 온 가족에 싸여 축제 분위기에서 내겐 그도 사치였나 싶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국에 밥말아 먹은 졸업식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상담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천지신명이여.

손짓을 하는 그녀가 아이를 두고 얼른 가라는 말에, 나는 엄마엄마를 외치는 아이를 두고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 땅에 질질 끌리는 졸업복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졸업 단상 옆에 자리했다. 그 찰나 나도 엄마가 보고 싶었나 보다. 의자에 앉으니 그날이 졸업식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금방 그 칠 줄 알았는데, 한참 동안이나 멈추질 않았다. 옆에 있는 동기가 어깨를 감쌌다. 무슨 감정이었을까. 후련하다, 장하다 시원하다였을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도 아니었다. 그저 마침표에 대한 진한 애도와 스스로에 대한 연민 정도였으리라. 나는 주로 연민이라는 표현에 박한 편이다. 그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데, 그날만큼은 아니 졸업식에서까지도 나는 학생이기보다는 엄마였고, 단 한순간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일을 치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연민에 젖어 있고자 했던 듯하다. 그랬다. 연민조차 아까워 두고두고 장을 만들던 나는 그날만큼은 장독대에서 꺼내 신나게 상처에 발랐다.


우여곡절의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녀석을 손에 꼭 쥐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학사모라도 어디에 두면 좋겠는데, 손이 없어 슬픈 이 짐승은 온 동네방네 지하철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 나는 오늘 졸업했습니다'를 이마에 써 붙이고 연신 날아오는 Congrats에 땡큐를 남발했다고 한다. 그도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그다지

안전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지하철에 눈이 까만 동양인이 시퍼런 학사모를 쓰고, 한 손에는 아이 손을 한 손으로는 졸업복을 잡고 시꺼먼 배낭으로 상반신을 가득 채운 내가, 그들 눈에는 동물원 원숭이보다 더 볼만했으리라. 어차피 나는 그들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당장 내일 과제가 없다는 건.

당장 비자가 허락하는 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당장 일자리가 없으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함이었고,

엠벵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   길어진 가방끈으로  살이고  먹은 나이로 

일자리를 구할  없을 확률로 다시금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죽음을 피해 온 나에게 다시 인생은 강한 보색을 가져다 대며,

어디 한번 살맛 나게  주랴 하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눈물나게 뜨거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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