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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Scent Sep 27. 2024

달큰한 어른

달큰한 어른이라 적고 덜 큰 으른이라 적어본다. 


어쩌면 내 안의 불안한 날것들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난제임에, 그렇게도 파고드는 책들이 많이 나와 아직도 서점에서 '나'를 찾는이가 여적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찾는 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바라온 부모의 뒷자욱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당신의 부모님과 당신의 다 크지 않은 내면과 어떤 화해를 이루고 살아가는지 물어보고 싶다. 어디에선가 부모의 낡음을 탓하지 말라고. 그 낡음이 되기 까지 당신의 성장이 있었고 네가 말하는 혹은 바라는 세련됨은 시간이 지나 당신이 부모가 다음 파도타듯 다시 낡음으로 장성한 아이들에게 넘어 것이라고. 각자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왔는지는 모르겠어서, 유독 나의 이야기로 시작해야 때가 있는데 오늘도 날인 같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했던 외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못생긴 딸래미로 태어난 나는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고추달린 여자아이로 컸다. 하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모나지를 못해서 이리저리 치이며 발에 걸리면 걸리는대로 놀리면 울기도 하며 자존감 하나는 어디 하나 빼놓고 커갔던 것 같다. 엄마의 첫 아이라 그랬는지 깜냥도 안되는 아이의 방에는 수백권의 책과 수십개의 지도가 벽에 붙여진 채로 별나게 그리고 괴짜같은 돌아이로 자랐다. 


엄마는 나의 괴짜스러움을 아마도 영특함으로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이리 되었든 저리 되었든 고슴도치 함함하듯 나를 그렇게 키워냈다. 그래도 마지노선은 착함으로 마무리 해야 여러모로 조용하게 살기 좋았음에 나는 아마도 착한 우리 개딸로 착실히 나이를 먹어갔던 듯 싶다.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근처의 연세대학교도 가지 못했고, 언감생심 서울대학교도 가지 못했다. 꿈을 크게 가지면 좋다는 말은 순 뻥이다. 방향성도 모르는 채로 꾼 큰 꿈을 우리는 허황됨이라고 한다. 나는 생각치도 못한 그 대학교를 엄마는 정말로 갈 수 있다 기대했다는 것에 나는 일차로 놀랐고, 가지 못한 나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을 때 이차로 나도 엄마를 따라서 그대로 나에 대해 실망하고야 말았다. 


나는 내가 다니는 학교도 겨우 갔다고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엄마는 아마도 저런 대학교 등록금을 내겠다고 내가 저런 노력으로 키워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마 그 때쯤이었나. 숨이 막힐듯 엄마를 바라보는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내 벽장에는 항상 가출을 위한 가방이 상비되어 있었고, 20대의 나는 허황된 대학교를 바라보던 엄마마냥 , 그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여행경비를 모았고, 몇 대륙을 제외하고는 발에 담아 보곤 했지만 아무 데에도 내 길은 없었다. 책에 답이 있나 싶어 들어간 독서토론 동아리에서는 허구한날 술을 퍼마셔가며 스피노자와 철학을 읊어대고 툭하면 막차 시간에 집에 들어가니, 엄마 눈에는 저년새끼에 대한 배신감은 아마 생각보다 깊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엄마의 바람을 항상 만족시켜 주고 싶었다. 


그 밑바닥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정형화된 성공말고 내 기준의 성공을 반드시 해내어 엄마 니가 틀렸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였는지, 아니면 여전히 착한 개딸이라 나 또한 자식을 키워보니 그 허황됨 조차도 사랑임을 알았다고 고백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지지리도 취업은 안되고, 어디 같잖은 중소기업의 돌림빵에서 치인 지친 몸을 누이고자 찾아간 대학원 등록금은 또 비싸긴 호되게 비쌌다. 후루룩 국에 밥 말아먹듯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보니 나는 아마도 시간이 흘러감에 앞서 인생의 시간표에 한줄이라도 내용을 적어야만 채워지는 줄 아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그 끄은적 끈적거리는 정말 질척거려서 떼어내고 싶은데 무슨 인연인지 부모와 자식관계는 냉정해 지지 못하고, 끌려 다니듯 때로는 의무와 눈뜬 맹인마냥 서로를 그렇게 더듬다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땅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두려워졌다.


가끔 궁금하다. 


부모가 너무 좋아서 정말 친구같이 정다움에 겨워 살아가느나 이가 있는지. 

역시 나는 딱 여기까지이다. 이해와 운신의 폭을 남에게 들이대다니..


여전히 식이요법으로 모든 치료가 가능하다는 엄마의 믿음 안에 아들의 뇌전증은 뇌에 좋은 음식으로 완치에 가까운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는 카톡에 기함을 하고 핸드폰 액정을 깨 먹을 뻔한 적이 있다. 아들은 약물치료를 받고 있었고, 몸에 화학물질을 들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엄마가 보낸 관심은 삐뚤어진 내 마음안에 곧이 곧대로 들어갈리가 만무했다. 


그 것이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낡음이었을까? 

그 때는 되고 지금은 안되는 그래서 정말 낡음이었을까? 내가 아직도 가슴이 답답한 이유는.

이제는 미국에서 살며 엄마가 원하는 그럴듯한 기업에서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를 이제야

 '미국에게 빼앗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딸'이라 부르는 엄마와, 나는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우리는 싸웠던 적이 없었는데 나 혼자 유난이었나. 

엄마가 빼앗긴 딸은 그 언제든 엄마의 것이었던 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제 엄마를 이해조차 하기 싫은데.

아이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엄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가 해피엔딩이 없는 영화야"


왠지, 오늘의 어리석은 내가 낡아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나의 아이에게 비슷한 레퍼토리를 전해줄까 싶어 가슴이 덜걱거린다. 애써 좋은 엄마인 척 하는 나는 어쩌면 우리 엄마와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덜 큰 어른은 해피엔딩에 굳이 목을 매지는 않는다고 큰 소리를 뻥 치고, 역시나 슬픈 영화로 만들고 싶지도 않아 그 애매함으로 매일을 애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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