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포 해수욕장
결혼 전 나는 통금과 외박 불가라는 고난에 시달리며, 밤새 술먹기, 급 여행 떠나기와 같은 로망을 키워왔다. 남편도 대학생 때부터 결혼 전까지 나의 통금을 맞추느라 고군분투해왔고, 누구보다 얼른 해방의 날이 와서 시간 걱정 없이 데이트하는 날을 꿈 꿨으리라. 근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홍대 거리를 누비며 밤을 새고 싶어 하던 젊은 날의 우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으로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밤새 술먹기 로망은 열두시 이후로 급격하게 저하되는 체력 문제로 접어두어야 했지만, 여행마저 포기할 순 없었다. 다행히도 둘 다 여행에서 만큼은 남다른 에너지가 솟아났고, 결혼 이후로 우리 부부가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차박과 캠핑이다. 감성캠핑을 위해서는 장비빨이 중요하다지만 우리에겐 언제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낭만이다.
원터치 텐트 하나 마련해서 호기롭게 떠난 첫 캠핑지는 백리포 해수욕장이었다. 처음 텐트에서 자는 여행이니만큼 남편이 고심 끝에 고른 캠프 사이트다. 전기도 사용할 수 있고, 화장실도 깨끗하고, 관리가 잘되고 있는 곳이었는데 무엇보다 캠핑장을 운영하고 계신 주인아주머니가 굉장히 친절하셨다. 우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위쪽 사이트에 자리를 잡고, 오후 낚시를 하러 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좀처럼 여유 부리기에 관대하지 않은 나는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원투 낚싯대를 바다에 던져놓고 멍때리는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시간의 행복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서해는 해질녘 노을이 정말 아름답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일정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지난 일주일간 집과 회사를 오가며 쌓였던 사소하고도 부정적인 감정들은 흘려보내도 좋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노을 구경을 실컷 하고, 예상치 못하게 잡힌 가자미 한 마리를 방생해주고 나니 저녁 시간이다. 우리는 보통 그 지역의 마트나 수산시장에 들러 미리 장을 본다. 서해는 제철 해산물을 맛보기 좋아, 모항 수산시장에 들러 구이용 석화와 빅사이즈 홍합을 사고, 광어회도 떠왔다. 사실 애주가 부부의 캠핑은 그날의 주종이 가장 중요하다. 이날은 첫 캠핑을 자축하며 브뤼를 잔뜩 사서 양껏 마셨다.
달큰하게 취해서인지, 모든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이 느껴졌다. 몇 점 남지 않은 항정살을 뒤집다가 그릴 사이로 자꾸만 빠뜨리는 남편의 실수에도 우리는 숨을 못 쉬어 가며 낄낄댔다. 그 밖에도 탄산수 제조기로 스파클링 와인 만들어 먹기, 유튜버 빙의해서 빅사이즈 홍합 먹방 찍기, 손전등으로 귀신 인척 하기 따위의 놀이들을 하며 매우 귀여운 밤을 보냈다.
집에서 마주하는 남편과 캠핑을 하며 마주하는 남편은 사뭇 다르다. 야구랑 웹툰과 결혼한 줄 알았던 남편이 이렇게 부지런하게 놀거리 먹거리를 세팅하고, 저녁을 먹은 후엔 술이 올라 흐느적대는 날 대신해 뒷정리를 도맡아 해 주다니. 곳곳에서 깊은 배려심이 묻어나고, 새삼 듬직한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걸 느낀다. 남편을 재발견하는 재미만큼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음 여행이 벌써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