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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갑낫을 Jan 19. 2022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

시는 시다.

얼마 전 결혼을 앞둔 친한 동생의 청첩장을 받으러 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이제 와서 결혼 생활에 대한 실체를 알려달라며 온갖 귀여운 질문을 해댔는데, 그 와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시댁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녀를 보며 나의 지난 3년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돌이켜보니 우리 부부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였다. 문제는 이 용기를 불효로 착각하는데서 온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문제에 대해 합의하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부부만의 안전지대를 가꾸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과제인데 말이다.


결혼을 하고 나니 안부전화, 명절, 생신, 경조사 등등 결혼 전에는 생각도 안 해본 문제들이 주요 고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양가 안부전화는 각자가 맡아서!"라는 형태로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 합의점을 찾아 우리만의 규칙을 정해두었는데, 거기에 이런저런 시댁의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혼을 했으면 며느리가 살갑게 연락도 자주 하고 그래야지, 걔는 왜 전화 한 통이 없니?... 문제는 이런 공격을 받으면 남편에게 암흑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남편은 주기적으로 화를 내시는 시어머니의 전화에 실형 선고를 받은 죄수마냥 괴로워했고, 시누이까지 합세해서 중간 역할 잘하라고 들들 볶자 좌절했다.


그런데 그런 전화가 오고 간 후에 막상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를 대하셨다. 나는 그 패턴이 주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어머니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시면, 남편은 안절부절못하다 "죄송합니다. 잘할게요."를 남발하며 어머니를 달래 드리는 패턴.


"엄마, 안부전화에 대해서 저희는 양가에 각자 전화를 드리기로 결정했으니 제가 자주 연락드릴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운한 마음이나 기대감은 갖지 말아 주세요."


이 말이 어렵나? 남편이 대응방식을 바꾸어 주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시어머니가 휘두르시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온전히 휘말렸고, 이 상황이 우리 부부의 삶의 질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초반에는 그 소용돌이에 같이 휘말리던 내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가정상담을 제안했다.


남편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중간에서 달래야 하니 진이 빠질 수밖에... 남편도 전문가의 조언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상담을 진행하는 것에는 우리 부부가 동의한 상태였고, 이제는 어떤 상담센터를 고를지, 비용은 어느 정도 선까지 고려할지 등등의 현실적인 결정이 필요했다.


우리 부부가 겪고 있는 문제 상황과 그에 대한 생각을 남편과 나의 입장에서 각각 글로 정리해서 상담을 의뢰했다. 1회에 10만 원부터 많게는 50만 원까지 우리에게 잘 맞는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서 상담을 받아보며 노력했는데, 1차적으로는 실패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었다.


그래도 일단 상담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합리적인 비용으로 받을 수 있는 상담이 있는지 알아보다가 각 구마다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가정상담, 부부상담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신청했다. 몇 개월간의 대기 시간은 걸렸지만 매주 1회, 총 14회의 상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상담 자체만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매주 1회씩 상담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대토론의 장(a.k.a 개싸움)이 펼쳐졌는데 이 시간들이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대화의 방식도 서로 이해해달라고 종용하는 형태에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내 입장과 감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시댁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대화를 피하고 싶어 하던 남편도 끊임없는 싸움과 대화 속에서 점점 자기 객관화와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얻었고, 우주 대폭발만이 살길이라고 믿었던 나도 남편의 성향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아갈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하게 되었다.


6개월의 상담이 종료된 이후, 남편은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아 보인다. 시어머니의 한마디에 갈대처럼 흔들리던 사람이 몇 개월 만에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힘을 줘야지, 생각한다. 남편의 노력과 달라진 생각들만으로도 나는 매우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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