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시다.
지난 추석, 시어머니는 안부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놓고 우리를 혼내셨다. 안부전화에 대한 우리 부부의 규칙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아들 전화만으로는 어머니를 만족시켜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당황했고, 난 폭발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시댁과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가정상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10월에 시작한 가정상담은 연말을 지나 새해를 맞이했다. 중간중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남편에게 중간 역할 잘하라며 역정을 내는 바람에 힘겨웠던 날도 있었지만 남편은 곧잘 버텨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무럭무럭 성장했고, 반복되는 갈등 상황을 해결하고 싶다는 공동 목표가 더욱 확실해졌다.
문제는 추석이 엊그제 같은데 해가 바뀌자마자 또 명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 설 명절은 우리에게 유독 빠르게 다가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참으로 고달픈 일이다. 그치만 그동안 다져진 맷집과 내공을 바탕으로 정면 돌파를 할 때가 온 시점이기도 했다.
사실 친정하고만 잘 지내서는 편안하게 행복하지 않았다. 뭔가 늘 마음이 쓰이고 불편했다. 시댁과 친정, 그 밸런스를 잘 맞추고 싶었다. 평생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거리두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 불편함 개선협회 회장으로 역할을 할 때가 왔다.
남편에게 명절 당일 어머님 댁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맛난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만들어 가고 싶었다. 시댁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며느리가 하는 게 없네, 음식이 어쩌고 설거지가 저쩌고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남편도 좋은 방법이라며, 어머니께 말씀드려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화 통화를 마친 남편이 잔뜩 열이 받은 채로 다가오더니, 이번 설날에 시댁에 갈 필요가 없단다. 이유를 들어보니 시어머니의 잔소리 폭격이 이어진 것! 정초부터 누가 외식을 하냐며, 음식 준비며 설거지에 관련된 이야기가 오고 간 듯했다.
응당 며느리라면, 명절에 가족들이 다 같이 먹을 음식도 돕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안부전화부터 명절까지 어머니가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모든 게 괘씸하셨던 것 같다. 다만, 그건 어머님의 바람일 뿐이다.
우리 집에서는 명절 음식 준비 및 설거지를 사위인 남편에게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며느리인 내게 그런 부분들을 바라시지 않도록 잘 설명해드리고,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제안드려서 이끄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이런 얘길 하면 그건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옛날 마인드를 가진 어른들은 안된다고,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맞추고 넘어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왜 이상적인 명절을 꿈꾸면 안 되는 거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하는데, 서로 고통 속에 나뒹굴면서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무튼 낮동안 호기롭게 이번 명절엔 본인도 안 갈 거라고 하던 남편은 저녁 즈음이 되자 결단을 한 듯, 내게 말했다. "이번 명절엔 나만 다녀올게. 너랑 같이 가면 작년 추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내가 가서 잘 말씀드리고 올게."
그렇게 명절 당일 아침, 그는 "내 여자 지키기 참 힘들다."라는 감동멘트를 남기고 유유히 떠났다.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는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남편은 갈등이 뻔히 예고되는 상황에서 지난 추석과는 다르게 나를 지켜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림을 느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남편은 시댁에서 어머님이 챙겨주신 명절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서둘러 집에 왔다. 내심 아들 부부가 싸웠을까 봐 걱정되신 어머니가 점심은 아내와 먹으라며 돌려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는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낼 수 있게 더 노력해본다고 했다. 어머니와 이야기가 잘 된걸까?
아무튼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가 현실이 되다니! 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편의 마음과 걱정하실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라 미안했고, 고마웠으며, 약간 통쾌(ㅠ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모든 명절에는 부디 우리 모두가 웃으며 만날 수 있기를, 하고 마음속 깊이 진심을 다해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