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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Roro Mar 07. 2024

33/100 나의 멜랑꼴리아

설거지옥

 침을 맞고 싶다. 뇌의 어디 딱 한 구석에다가.   엽기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그렇지도 않다. 어깨가 아파서 어떤 부위를 꾹꾹 누르거나 침을 맞으면 딱 개운해지듯 말이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정확히는 반복된 단순 업무를 할 때 발현되는 잡생각이 있다. 아니 특정 카테고리의 잡생각들이랄까. 어느 날은 꼼짝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이런 생각들이 흘러나왔다. 나의 흑역사들이 주마등처럼 쫙 재생된다. 아마 단순 작업이라 몸이 기억해서 생각과 따로 손은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 실수, 바보 같은 언행등이 계속 봉인이 풀리듯 흘러나와서 괴롭다. 그럴 땐 이를 악물고 하던 일을 진행한다. 지금 멈추면 하다가 말고 그냥 둘 것 같아서. 'Runner's high'라고 했던가. 달리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뇌의 반응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나는 'washer's low'의 케이스겠군. 설거지를 할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오니. 그건 설거지자체가 싫어서일까 아니면 머릿속에 생각들이 끄집어내 지기 적당한 상황이라 꼼짝없이 흑역사 재생 잭팟인가. 뭐가 되었든지간에 한동안 설거지를 피했다. 마지막 찻숟가락이 다 쓰일 때까지. 더 이상 쓸 수저와 그릇이 없어질 때까지. 그래서 일회용 식기와 수저를 꺼내려다 이 악물고 'washer's low'를 묵묵히 견뎠다. 예전 어느 날 늦은 저녁, 잠을 이기지 못해 임신한 배를 부여잡고 눈을 감다가 시냇물소리가 나서 방 밖을 보니, 남편이 밀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바닥과 욕실 청소, 나는 설거지와 식사 준비를 주로 맡았는데, 문득 미안함과 동시에 은인 같더라. 나만의 스트레스가 아님에도 부엌에 업보를 그렇게 쌓아뒀는데, 누군가가 지옥불에서 타고 있는 나를 위해 추운 새벽 기도해주고 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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