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대학은 벼락치기로 나온 게 아니다.
공사장은 모임 이름이다. 뜻은 [공연을 사랑하는 장사꾼]이다.
낯선대학을 설명할 때 꼭 필요한 키워드라 이렇게 소개를 한다.
공연계에 몸 담은 청춘들이 모였다. 이 모임을 만든 처음 2명이 각자의 지인 2~3명씩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최초 2인은 당시 pmc에 다녔던 손석호, 신시컴퍼니에 다녔던 오지원이다.
난 오지원과 같은 대학원에 다녔고, 그가 나를 이 모임에 당겨주었다.
몇 번의 모임을 가지면서 멤버가 고정되었다.
-에이콤 박종환(지금은 CJE&M 공연커뮤니케이션 팀장)
-설컴 오훈식(지금은 알앤디웍스 대표)
-악어컴퍼니 김요안(지금은 두산아트센터 PD)
-신시컴퍼니 오지원(지금은 국립극장 PD)
-서울예술기획 백영선(지금은 카카오 _ 리더가 되지 못한 백성)
-PMC 손석호(지금은 SK플래닛 역시나 백성)
-서울프린지 김상미(지금은 교직원공제회 스텝)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맥스무비(공연)에 다니던 배태미가 결합했다.)
대학로 카페 장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모이긴 했는데, 모임 이름도 없었고 뭘 할지도 몰랐다.
일단 모인거다. 워낙 궁하게 살던 때라 회사동료 외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 만으로도 다들 들떴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모이는데 꼭 이유가 중요한가? 이유는 차츰 만들면 될 일을.
모임명은 카페 장에서 모인 것도 있고 마케터들이 많아 공사장 안이 쉽게 통과되었다. (깨알자랑 하나. 공사장 이름은 내가 던졌다) 월에 한번 모여, 각자 사는얘기와 각자 회사 돌아가는 얘길 나누는 걸로 모임의 방향을 잡았다. 공사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https://news.v.daum.net/v/20081127165212403
공사장은 여러모로 도움이 컸다. 서로 진행하는 공연도 보여주고, 서로 진행한 마케팅 프로모션도 공유하고, 서로 그 바닥에서 버틸 수 있도록 잔뿌리같이 도움을 주고 받았다. 매해 12월에는 송년파티를 기획했다. 우리끼리 놀게 아니라 각자의 지인들(대개 공연계/공연과 연관된 분들)을 초대했다.
시간이 흘러 2기 얘기가 솔솔 나왔다. 뭐 어려울게 있나.
각자 추천을 통해 공사장 2기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공사장은 조금 커지고 조금 무거워졌다.
시간은 여러 변화를 가져왔는데, 1기 멤버들의 이직과 결혼도 변화 중 하나다.
3기 얘기가 잠깐 나왔다가 증발되었고,
공사장 활동도 차츰 줄어들어 언젠가부터 1년에 한두번 모임만 가졌다.
송년회와 누군가의 결혼 덕분이었다.
느슨함이 더 늘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다 10주년을 맞이했다. 특별한 세레머니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했다.
박종환이 회사챤스를 섰다. 콘도를 예약했다.
갈 수 있는 이들이 붙었다. 그렇게 나, 종환, 지원, 상미가 제주로 갔다.
(난 당시 제주근무라 제주에서 조인했다)
기억난다. 그들을 공항에서 만나, 서쪽 숙소로 가던 길.
처음 들렀던 빵집 중간에 들렀던 해변가. 저녁 먹으러 갔던 식당.
더 멋진 밤을 위해, 모슬포에서 잘나간다는 횟집에서 '회'를 받아 숙소로 갔다.
술쟁이들이 없어 술은 쪼큼만 샀다.(그것도 남았다)
한두잔 '짠''짠'하다, 낯선대학 아이디어를 던졌다.
물론 당시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제 곧 제주에서 서울로 근무지를 옮기는데, 걱정이 한라산보다 높았다.
제주는 그야말로 안빈낙도의 삶이었는데 이걸 포기하고 육지로 가려니 까마득했다. 나이 마흔. 뭔가 다부진 경쟁력이 없었던 나는 마음이 쫄렸다. 그러다 대학원에 다시 입학할 생각을 해 왔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진짜 까마득했다.
결국 까만 바다, 흩어졌던 오징어 모으는 집어등처럼
꺼내든 불빛이 공사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1년간 진행되는 낯선대학 프로젝트였다.
술기운이었는지, 자연의 기운이었는지
그들은 호기심을 보였다.
"일주일 내, 기획안을 공유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