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자가 서울여자에게' 보내는 네 번째 편지 - 아빠
작년이었나. 제가 오랜만에 육지에 올라갔던 날, 아빠는 딸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점심상을 차리고 있었어요. 점심시간에서 한두 시간쯤 늦어진 시간에 집에 들어갔을 때 아빠는 반가워하기도 전에 밥부터 먹으라고, 찬밥 밖에 없어서 어쩌냐며 전자레인지에 밥을 돌려서 내 앞에 김이 폴폴 나는 밥그릇을 딱 내려놓았죠. 제가 밥을 한 술 뜨자마자 아빠가 말했어요.
"밥 차갑지? 렌지에 좀 돌려줄까? 밥을 새로 좀 할 걸 그랬나?"
아...
엄마랑 통화할 때 아빠가 약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 자꾸 깜박깜박한다던 말이 실감이 났어요. "에이, 방금 돌렸잖아, 아빠" 하고서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면서 어렵게 밥을 삼켰던 기억이 나요.
언니, 언니의 딸은 어느새 자기주장이 생긴 두 돌배기가 되었으니, 이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나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나는요.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좋은 것과 싫은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그 순간부터 내 기억에 남아있는 유년시절까지 저 질문에 변함없이 같은 대답을 했어요. 내 대답은 당연히 아빠. 언제나 아빠. 엄마의 섭섭함 같은 걸 고민할 새도 없이 늘 아빠였어요.
지금은 저런 질문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지금 만약에 저런 질문을 지금 다시 받게 된다면- 음, 언니,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엄마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어요. 불같이 무섭던 엄마는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친구가 되었고, 어렸을 때 내가 그렇게 쪽쪽 빨고 앵겼었다는 아빠는 내가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불편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에요.
내 아빠는, 웃음이 너무 많아 젊어서부터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하던 아빠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받는 딸'인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하던 우리 아빠는, 일흔이 넘은 지금, 얼굴에 표정이 없고, 목소리가 크고 화난 듯이 엄한, 그래서 하나뿐인 손녀가 피하고 싶어 하는 무서운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짝사랑하던 딸을 제주로 보낸 그 해에, 아빠는 파킨슨병을 진단받았어요. 근육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처음엔 손이 덜덜 떨렸고, 조금 지나서는 걸음이 불편해졌고, 한 해가 지난 후에는 신경 쓰지 않으면 미처 목구멍으로 삼키지 못한 침이 떨어졌고, 이제는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점점 불편해지네요. 램프의 요정처럼 무엇이든 말하는 대로 이루어주던 지니 같던 아빠는, 이제 무거운 밥상을 드는 것도 어렵고, 맥주 캔을 따기도 어렵고, 휴대폰에 충전기를 연결하는 데도 한참이 걸려요. 가족들의 가벼운 대화가 어떤 내용인지 짐작만 하며 앉아있어야 할 때도 있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버거울 만큼 많은 약들을 먹을 때도 손이 덜덜 떨리게 되었죠.
왜 우리 아빠일까요.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우리 아빠여야 했을까요.
언니, 지금도 난 그 생각을 참 많이 해요. 우리 아빠는요. 많은 아버지들이 그랬겠지만, 참 열심히 살아왔어요.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났을 때 형제 중 가장 착했던 우리 아빠는 할아버지를 따라 신발 파는 보부상이 되었어요. 철 없이 즐거운 학창 시절도, 절친한 교우 같은 것도 갖지 못했죠.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학원에서 무료로 일을 해주고, 불 꺼진 학원 칠판에 밤새 공부를 했다는 아빠의 과거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우리 남매에게 반복되던 레퍼토리였어요. 그렇게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패스해서 그토록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돈이 없어 2년을 채 다니지 못했대요. 그렇게 다 배우지 못한 한을 아빠는 야학 선생님이 되어 봉사로 풀었다고 했어요. 인기 많은 야학 선생이라 신문에도 실렸었다고 종종 자랑하시곤 했죠.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그 젊은 시절을 보내고 그 후로도 아빠는 종교활동을 통해서 열심히 봉사하며 살아왔어요.
아빠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가끔씩, 무수한 좌절을 딛고, 수없는 장애를 넘으며,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명예로워진 어떤 이의 위인전을 듣는 기분이 들곤 했어요. 이만하면 아빠의 인생에 작은 상 하나 정도는 주어도 좋을 것 같은데, 왜 상 대신 그 나쁜 병마가 우리 아빠에게 왔을까요. 힘들었던 시절조차 찬란한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었다 여길 수 있을 만큼 빛나는 누군가가 되었데도 참 좋았을 텐데...
언니, 우리 아빠는 그토록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 그냥 나의 아빠가 되었어요.
세상에서 아빠를 제일 좋아하는 애교 많은 딸은 딱 열 살까지였어요. 그 후로는 늘 나는 아빠의 애정이 부담스러웠어요. 나이를 훌쩍 먹었을 때까지도 집에서 늘 나를 따라다니는 아빠의 시선이 껄끄러웠고, 손 잡기를 좋아하는 아빠의 움찔거리는 손을 못 본 척했어요. 열세 살 때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생일이 되면 나이에 맞게 장미꽃을 선물해주는 아빠의 낭만에, 나는 한 번도 호들갑스러운 고마움을 전한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자상한 아빠를 부러워하는 친구에게 나는 아빠의 사랑이 유난스럽다고 했던 곳도 같아요.
제주에 이사 올 때도 나는 그냥 내 생각만 했어요. 연로한 아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제주에 시집간 셈 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는 게 쉬웠어요. 아빠가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라고 가지 않아도 될 이유들만 떠올렸어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 중에 아빠와 함께할 시간들을 다 합쳐도 채 1년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하며 살아요.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많은 것들을 어쩔 수 있도록 해 준 아빠에게, 여전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는 내가, 왜 하필 그런 내가 아빠의 딸일까요.
언니, 난 이미 알 것 같아요. 아빠가 없을 훗날, 아빠는 내게 그리움보다도 죄책감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것. 그게 참 벌써 부어 안타까운데, 이미 나는 아빠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인데, 미안하지 않을 만큼 예쁜 딸이 되는 것이 참 어렵네요. 회사를 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럼 고양이는 두고 육지에 올라와 지내면 어떻겠냐는 아빠에게 나는 이번도 고양이도 내 소중한 가족이라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어요. 고양이를 사랑해서 노력하는 만큼, 아니 그 반에 반만이라도 아빠한테 노력하는 딸이라면 참 좋을 텐데. 고양이만 두고 올라올 순 없지만, 아빠 보러 자주 오겠다고 예쁘게 말하는 딸이라면 참 괜찮을 텐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나를 알면서도, 나는 그저 앞으로 내가 갚아나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기를, 내가 나아질 수 있는 기회를 아빠가 다 주고 떠나기를 바라봐요. 어쩜 이조차 나에게 후회와 회한이 덜 남길 바라는 이기심일지도 모르겠네요.
언니, 언니는 엄마가 되었으니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게 되었나요? 나는 아마 앞으로도 엄마가 되지는 못할 것 같아서 내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그 정도와 크기와 깊이를, 그 눈물겨운 짝사랑의 아픔을 아마도 평생 모를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인데, 가끔은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알고 나면, 엄마 아빠 생각할 때마다 너무 그냥 슬플 것 같아서.
물론, 내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신부 입장하는 것이 꿈이던 아빠와 외할머니도 되어 보고 싶은 엄마는 아직도 나의 결혼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지만. 흑. 이조차 불효야! ㅠㅠ 아니 근데 엄마빠,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라니깐요?)
굳이 제주로 멀리 떠나와서 여전히 부모의 걱정거리로 살아가는 개딸의 편지는 결국 무거워지고 말았네요. 그래도 기꺼이 열심히 읽어주었기를. 우리 아빠의 삶을 같이 안타까워해주고, 박수쳐주었기를 바라요. 이 편지를 통해서 언니와 나, 새끼손톱만큼은 살갑고, 어여쁜 딸이 되었길 기도하며. 언니 이야깃속에서 늘 멋쟁이셨던 언니의 아버지 이야기도 기다릴게요. 안녕!
20대 중반에 같은 동네에서 만나 30대 초중반까지 함께 봄 같은 청춘을 보냈지만,
지금은 서울의 큰회사(!)에 다니며, 가정을 꾸려 살고 있는 서울여자와
2013년 제주로 떠나와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제주여자.
비슷했으나 또 많이 달라진 두 친구가 같은 주제를 두고 서로 편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