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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Mar 02. 2017

[노래 소설] 윤수일의 "아파트"

그렇게 나는 내 키만큼의 세상 이치를 배워 갑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이름 모를 작은 산등성이. 그곳에서 나는 양 옆에 부목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약하고 여린 작은 묘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 아주 비슷한 나무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세상에 해와 달, 별, 그리고 구름이 세상에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고 행복했던 시간은 아쉽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묘목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목적에 따라 옮겨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내 키가 사람의 키만큼 자랐을 무렵, 나는 드디어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덜컹거리는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실려 가면서 나는 그제야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들이 존재한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먼 여행을 통해 도착한 곳이 바로 이 곳,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5층짜리 주공아파트 단지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긴 트럭 여행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힘 좋아 보이는 아저씨들에 의해 모래처럼 푸석하고 메마른 땅에 심어 졌습니다. 다행히 아저씨들은 꽤 튼튼한 부목을 내게 만들어주었고, 덕분에 나는 낯선 곳에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들이 떠나고 난 후,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커다란 글자 하나였습니다. <105> 아주 커다란 글자라 한 번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 105라는 숫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주공아파트 105동 옆에 심어진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105동 아파트도 나보다 엄청 큰 나무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05동은 예전 내 고향의 친구들과는 달리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고 비가 와도 꿈쩍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런 105동이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105동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작은 묘목인 저와 105동의 엄청난 키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아침햇살이 밝게 비추는 오전에는 충분히 햇살을 받을 수 있지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오후가 되면 저는 105동이 만들어낸 그늘 때문에 햇살 한 조각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들에게 햇살이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입니다. 작은 묘목이던 시절 우리 묘목들은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곤 했습니다. 촘촘하게 서 있던 묘목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키가 작아지면 그 묘목은 그만큼 햇살을 받지 못해 앉은뱅이가 되거나 시들어 죽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햇살을 105동이라는 녀석 때문에 오후 내내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짜증 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처음에는 조금만 움직여 보라고 소리도 쳐 보았습니다. 하지만, 105동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번엔 대답 없는 105동 옆구리를 내 작은 가지로 이리저리 간지럼도 피워 봤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105동은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햇살이 충만한 오전을 충분히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오전 시간을 이용해 어떻게든 내 가지들을 옆으로 최대한 뻗도록 노력했습니다. 엄청난 키 차이로 햇살을 받을 수 없다면, 옆으로 가지를 뻗어서라도 햇살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마침내 저는 오후에도 햇살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길어진 가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주변을 환경들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말이 없던 105동은 차가운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진 녀석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품고 사는 따뜻한 녀석이었습니다. 주로 아주 젊은 부부들을 품고 있었는데, 그들은 또 작은 아이들을 품고 낳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05동이 품은 사람들이 품었던 아이들이니 105동이 품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105동이 품었던 아이들은 정말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처음엔 작은 유모차에 실려 나와 제 앞에서 까르르 웃곤 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단지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뛰어놀게 되었습니다. 105동 101호 녀석은 엄청나게 개구쟁이여서 항상 불안했었는데 어느 날엔가는 나를 타고 높이 오르겠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혼이 난적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도 105동이 품은 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아직 105동 키를 넘어서려면 멀었지만, 어느새 내 키는 105동 허리춤까지 자라 있었습니다. 덕분에 105동 301호 민정이네 집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정이라는 아이는 105동 아이들 중 내가 제일 예뻐하는 아이였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민정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아빠를 기다렸는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언제나 방긋방긋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 주곤 했습니다. 내 키가 많이 자라고 가지가 크게 뻗은 덕분에 민정이네 집을 항상 들여다보며 민정이의 안부를 물을 수 있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행복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돌더니 기어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전 아파트 정원의 나무들이 너무 자라 일조권을 침해한다는 주민들의 신고가 아파트 관리소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올해부터 매년 봄마다 아파트 나무 가지치기를 실행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키운 가지들을 하루아침에 저 요란한 소리를 내는 톱으로 잘라 낸다니! 손발이 떨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어쩌면 도시나무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나 때문에 피해를 입는 누군가 있다면 기꺼이 내 가지라도 내어 주어야 하는 그런 운명. 결국, 그렇게 애를 쓰며 키웠던 나의 소중한 가지들은 요란한 전기톱 소리와 함께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저는 잘려나가는 가지들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105동 아파트도 저와 함께 무심히 바라봅니다. 너무 아프고 힘들 때는 아프다는 말도 나오지 않나 봅니다. 문득, 잘려나갈 팔다리가 없는 105동이 부러워집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릅니다. 나를 보며 방긋 웃어주던 민정이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101호 개구쟁이는 씩씩한 청년이 되어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 104호 할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더니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냐고요? 모두 아파트 아주머니들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그늘이 꽤나 늠름해질 무렵, 105동 옆에 넉넉한 벤치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이 벤치는 105동 아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105동이 품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문득, 내 키가 무척 자라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105동 키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매년 봄 겪었던 가지치기는 뼈를 깎는 아픔을 주었지만, 덕분에 내 키가 이렇게 쑥쑥 자랄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일은 절대적으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어 보입니다. 오늘의 좋은 일이 내일엔 나쁜 일이 될 수 도 있고 오늘의 나쁜 일이 내일의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나는 내 키만큼의 세상 이치를 배워 갑니다. 그렇게 시간은 또 무심히 흘러갑니다. 대학생이던 민정이가 드디어 시집을 갔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민정이만큼 예쁘고 작은 아기를 안고 105동 아파트에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반갑고 신기해서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나의 호들갑에도 105동은 여전히 묵묵하게 그 작은 민정이의 아기까지 품어 줍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민정이의 작은 아가도 무럭무럭 자라나 내 그늘 밑에서 뛰어놀 수 있겠지요. 하지만, 큰일입니다. 요즘 나는 예전처럼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키는 이미 105동을 거의 따라잡을 만큼 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 년 만 더 기다리면 105동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건 참 생각만 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입니다. 




<축! XX 주공아파트 재개발 확정!>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 나무 가지와 104동 나무 가지 사이에 이런 현수막이 붙었습니다. 처음 엔 이 현수막이 무슨 의미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105동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듣고, 나는 이 현수막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05동 품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105동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05동은 그렇게 냉정하고 무심하게 자신을 떠나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봅니다. 105동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마지막으로 홀로 사시던 104호 할머니가 105동을 떠나던 날. 할머니는 나를 부여잡고 한참을 우셨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할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나도 함께 울었습니다. 마침 바람이 불어 주어서 내 울음소리는 더욱더 크게 들렸습니다.  


 이제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공사장 인부들과 각종 장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05동은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105동은 100년은 더 늙어 보였습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좀비처럼 흉물스럽고 괴기스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105동을 라이벌로 생각하며, 미워했던 나였지만 그런 105동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낯설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모두를 품어 주었던 105동은 결국 그렇게 혼자 남아 무너져 내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105동을 허물고 더 크고 튼튼한 105동을 만든다고 합니다. 세련된 이름도 붙여 준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105동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야 105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105동은 새로운 105동을 위해 무너져 내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되냐고요? 운이 좋으면 다른 낯선 빌딩 옆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길 바라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 살을 깎는 아픔을 겪더라도 잘 다듬어진 목재가 되어 새로운 105동을 만드는데 쓰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도심 아파트에 살았던 나무들이 꾸는 가장 큰 꿈입니다. 그래서 저도 아낌없이 주는 105동이 되어 사람들 품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문득, 민정이가 낳은 아이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시끄러운 중장비 기계소리에 묻혀 버립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소리 없이 무너지는 105동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


>>윤수일의 아파트 노래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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