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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Dec 23. 2018

눈물이 퐁퐁

그대도 나 때문에 아주 조금은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 노래를 듣고 떠오른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미니 연재소설입니다. 참고로 지금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는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노래듣기♪



가게 마감시간 30분 전 영선은 서둘러 에스프레소 머신 청소를 시작했다. 그런데 청소를 하기 위해 손을 움켜쥐는 순간, 검지 쪽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검지 안쪽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베인 걸까?  피도 별로 나지 않아 다친 줄도 몰랐는데, 검지를 구부릴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영선의 눈썹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청소를 멈추고 상가 오른편에 있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상처 치료는 물론 방수가 잘 된다는 밴드를 추천받아 영선은 자신의 검지에 밴드를 야무지게 붙였다.   


   

밴드 붙인 손가락을 괜히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여전히 통증은 있었지만, 청소 정도는 충분히 할 만했다. 영선이 가게로 돌아와 조금 늦은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끝날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영선은 멈칫했다. 손님의 얼굴이 벌에 쏘인 사람처럼 여기저기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영선이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이, 손님이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핫초코 되나요?”     


영선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냥 주문을 받았다. 주문을 받지 않으면 손님이 그냥 울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문한 음료가 커피머신을 이용할 필요 없는 핫초코였고, 영선은 커피만큼 핫초코를 잘 만들 자신이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 청소를 잠시 미루고, 영선은 제일 먼저 우유 한잔을 따끈하게 데웠다.  머그컵에 지금 막 데운 우유를 반만 따르고 코코아 분말과 순도 100% 카카오 가루를 적당히 넣고 휘휘 저었다. 그래야 너무 달지 않고 진한 핫초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가루들이 잘 섞였다 싶으면 남아 있는 우유 반잔을 마저 부어준다. 엉켜 있던 가루들이 이른 봄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려 제법 예쁜 색감을 만들어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잘 녹아내린 핫초코 위에 카카오 가루를 살살 뿌리려는데, 영선의 검지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영선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 아무리 좋은 밴드로 싸맸다고 하더라도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절대적인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핫초코 나왔습니다.”

     

영선은 핫초코를 직접 손님에게 가져다주며, 마감 시간이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영선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제 흘러내린지도 모를 눈물이 손님의 벌건 얼굴을 더 벌겋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는 달달한 핫초코와 앞치마 주머니 속에 있던 방수 밴드를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때론 되지도 않는 위로의 말 한마디보다 못 본 척 무심하게 돌아서 주는 배려가 고마울 때도 있는 법이니까. 


사진출처 https://ymgs1888.blog.me/



 #노래소설 -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이소라)

    

그녀는 참 예뻤다.    

 

피부과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그랬다. 인형처럼 똑 떨어지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하얀 피부에 앞머리 없이 가지런히 뒤로 빗어 올린 머리와 동그스름한 이마가 참으로 탐나는 사람이었다. 옅은 갈색에 가늘지만 숱이 많은 머리카락 사이로 간간히 삐져나온 솜털 같은 잔머리 덕분에 그녀는 더 사랑스러웠고, 미색 블라우스 위에 따듯해 보이는 베이지색 카디건과  잘 어울리는 명품 가방은 그녀를 한층 더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만들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독서하는 소녀


예약 확인을 하고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기다란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가지런한 치마와 매끈한 스타킹 그리고 귀여운 리본이 달린 플랫슈즈가 보였다. 잡지책을 보던 그녀가 내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를 힐끗 쳐다본다. 나는 100년 전부터 이러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녀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낸다. 그녀는 아주 짧고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다시 잡지책으로 눈을 돌렸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그녀를 계속 바라보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그녀가 다시 나를  쳐다본다. 얼른 눈물을 감추고 나는 최대한 다정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반지가 너무 예뻐서요.”     


그러자 그녀가 나를 보며 샐쭉하게 웃는다. 작고 예쁜 손을 더 빛나게 만드는 반지를 그녀는 자꾸만 만지작거린다. 그녀의 반지가 ‘나 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하, 남자 친구한테 선물 받은 건데 저도 무지 마음에 들어요.”

“네, 반지랑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녀가 다시 미소 짓는다. 수줍지만 행복에 겨운 미소다. 나는 그런 그녀의 미소가 저 반지보다 백배는 더 탐나고 부러웠다.     


“피부가 무척 좋아 보이는데, 왜 피부과에 오셨어요? 혹시 결혼 준비하세요?”

“네, 다음 달에.......”     


사진출처 http://bonagem.co.kr/ring/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해서 그의 결혼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나는 이 명백한 이별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그와 2년을 연애하고 함께 1년을 살았지만, 그는 내게 저런 반지는커녕 선물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결혼 같은 건 무덤이고, 그런 무덤으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그때는 몰랐다. 그가 말한 무덤 같은 결혼은 나 같은 사람한테만 해당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 식사를 하던 그날에도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서늘하고 서운한 말이었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바란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저 저기 앉아 있는 그녀처럼 행복하게 웃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면 그는 내가 그렇게 웃는 것조차 싫었던 걸까?      


“혹시 이 피부과 자주 오시나요?”

“아뇨, 오늘 처음 왔어요. 왜요?”

“저도 오늘 이 병원은 처음이라 괜찮은지 어떤지 궁금해서.......”

“피부 좋으셔서 어느 병원이든 괜찮을 거예요.”  

   

그녀의 솜털 보송보송한 귓불이 다시 어여쁘게 붉어졌다. 그녀의 발간 수줍음은 그녀를 더 빛나게 만드는 조명일뿐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대기실 맞은편 커다란 거울에 비친 두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도 극명하게 다른 피사체다. 그녀는 수줍음에 얼굴을 붉어졌고,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어졌다.   

  

 “이하영 씨! 상담실로 와 주세요!”     


이하영. 그녀는 이름까지 예뻤다. 이름도 예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계속 자리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본다. 뒷모습조차 완벽한 그녀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내가 죽도록 미웠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친한 친구가 그와 같은 회사에 다녔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내 좋은 친구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내게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그의 교제 사실을 말했다고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가 단념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이후 나는 그의 SNS를 스토킹 하며 곳곳에서 그녀의 흔적이 찾기 시작했다. 결국엔 그녀의 SNS까지 찾아가게 되었고, 지금은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가 예약했다는 피부과까지 쫓아온 것이다.   


   


멍하니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나는 결국 상담실까지 들어가 버렸다. 상담실에서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코디네이터는 본격적인 피부관리 전에 성인 여드름 치료를 먼저 받아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피부관리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안 그래도 고민인 여드름 치료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결국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쳐 피부 관리실까지 들어왔다. 빈 침대에 눕자마자 누군가 내 얼굴을 클렌징해주겠다고 말했다. 눈을 감자마자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클렌징크림으로 내굴 구석구석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굴에 다시 온기가 돌아올 무렵, 누군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 뜨거우실 겁니다.”     


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다짜고짜 뜨거운 수건이 내 얼굴을 덮었다. 내가 움찔하자, 누군가 다가와 모공을 넓히는 과정이니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숨이 막히고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참을 만했다. 그 뒤로 이어진 고통스러운 시간들에 비해서는. 모공을 넓히자마자 그 누군가는 인정사정없는 도구들을 가지고 무지막지하게 내 여드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비명이 절로 날 만큼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리까지 지른다면 내 자존심은 이 지구를 탈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당 선생님 들어오셨습니다.”     


누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담당의는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영혼 없이 하더니, 폐허가 되어 버린 내 얼굴에 덧나지 않을 약품처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깊숙이 박혀 있던 여드름이 사라지고 남은 상처에 약품이 닿자마자 아까와는 또 차원이 다른 고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제야 담당의는 조금 따가우실 거라는 말과 함께 들으나마나 한 주의사항을 건조하게 주절거렸다. 물론 담당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음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 얼굴에 남겨진 상처들이 더 아프고 아렸기 때문이다. 

 

주절거리던 담당의가 나가고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만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을 무렵,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피부 관리실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개미 눈곱만큼 작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니, 나 아직 피부 관리실이야. 지금 마사지받고 얼굴에 팩 하고 누워 있다고. 응. 근데, 오빠. 나 아까 좀 웃긴 일 있었다? 피부가 대기실에서 어떤 아줌마가 자꾸만 내 반지를 쳐다보는 거야! 그래서 처음엔 왜 저라나 싶었다니까. 응? 에이, 설마. 반지가 탐나서 그러는 건 아닌 거 같았어. 그냥 부러웠던 거 같아. 백퍼 노처녀 같아 보였거든.  응? 자기 벌써 병원에 도착했다고? 나 아직 안 끝났는데.”

“저기 고객님 죄송한데요, 여기서 통화를 하시면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돼서요.”

“아, 죄송합니다. 오빠, 나 전화 끊어야겠다. 웅, 그럼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세용. 쪽!” 

    

가습기에서 퐁퐁 올라오는 수증기처럼 내 눈물샘에서도 눈물이 퐁퐁 올라왔다. 덕분에 여드름을 짜느라 열어놓은 모공 사이로 짜디 짠 내 눈물이 스펀지처럼 스며들었다. 누군가를 쿨하게 보내지 못한 미련스러운 미련에 대한 대가를 그렇게 나는 혹독하게 치러내고 있었다.      



다음화에서 계속....


#그저인연이아니었다말하기엔너무아픈이별

#상처가아물시간이필요하듯이별에도아픈만큼의시간이필요하다

#피부과에서여드름치료를받아본사람만아는진실

#피부과엔왜이리거울이많은지

#피부과엔왜이리조명이밝은지

#피부과에가면내열굴이부끄러울수밖에없는이유

#이소라 #이소라노래

#나를사랑하지않은그대에게

#나를사랑하지않는그대도나때문에아주조금은아팠으면좋겠다

#3인칭관찰자시점

#조경아 #조경아작가

#연재소설

#브런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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