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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26. 2024

17화. 4살 인생이 추석을 보내는 방법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더니 어느새 추석 명절이 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런 명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105동 주민들은 명절만 되면 집을 비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부모님 집에 가거나 성묘를 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요즘은 명절을 이용해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명절은 풍족하고 즐거울지 모르겠지만, 내게 명절은 더할 나위 없이 외롭고 처량한 휴일일 뿐입니다. 그래도 309호에 새로운 식구들이 이사를 오면서 외로운 명절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새로 이사 온 309호에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귀여운 꼬마 민수가 살고 있는데, 명절이 되면 온갖 친척들이 민수네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서울에 있어 부모님들이 서울로 올라오시는 모양입니다. 309호 명절은 스무 명이 훨씬 넘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루 종일 시끌벅적하게 보냅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한 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나는 TV 드라마로만 볼 수 있던 명절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석 당일 날 아침, 민수네 가족들은 차례를 지내고 푸짐한 아침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다 함께 둘러앉아 민수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105동 아파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물론, 어른들의 웃음소리까지 듣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재롱잔치를 주도하던 309호 꼬마 민수가 어느새 혼자 베란다로 나와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제 겨우 4살 정도밖에 안 된 민수는 어울리지 않게 한숨까지 길게 내쉽니다. 민수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걱정도 됩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민수는 다시 4살짜리 꼬마 녀석으로 변했습니다. 민수의 손에 누군가의 스마트 폰을 쥐어졌기 때문입니다. 신기합니다. 상심한 4살짜리 꼬마의 한숨을 저렇게 환한 웃음으로 바꿀 수 있다니! 역시 스마트 폰은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 2010년 10월 추석 명절연휴를 보내는 4살 인생  ]**


나는 4살이다. 그리고 지금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그것도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인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이다. 물론, 이 춤은 얼마 전 TV에서 보았던 형과 누나들의 춤이다. 내 동작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내가 춤을 즐긴다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춤을 추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저 나는 내 나이에 맞는 광대 짓을 하고 있을 뿐이다. 4살이 된다는 건 그래서 참 힘든 일이다.


나도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3살 때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다. 하지만, 놀이방에 다니면서부터 그렇게 해서는 더 이상 편하게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이런 고단한 인생이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이렇게 몇 년을 더 살아야 하는 걸까? 그때가 되면 또 다른 방식으로 힘들어지는 걸까? 갑자기 인생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진다. 문득, 아기시절이 그립다. 1~2살 때까지만 해도 울기만 하면 모든 식구들이 어떻게든 내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아마도 2살 무렵이었을 거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는 나를 달래며 엄마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그래, 지금 마음껏 울어. 지금이 제일 좋을 때니까. 이제 조금만 더 크면 이런 응석도 아무 소용없을 거야! 알아들어?” 

지금 생각해도 어릴 때 먹었던 우유가 다시 올라올 만큼 끔찍한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지 몰랐다. 물론, 지금 내가 춤을 추며 사람들에게 재롱 아닌 재롱을 부려야 하는 것도. 


간혹 머리가 나쁜 애들은 내 나이가 되어서도 1~2살 아기들처럼 무조건 울면서 떼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다. 한두 번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뿐이지 점점 더 삶이 힘들어진다. 좀 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아야 내가 원하는 것을 조금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른들이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 폰이다. 스마트 폰 안의 세상은 정말 신세계다. 하지만, 어른들은 4살 먹은 꼬마에게 그런 스마트 폰을 사주지 않는다. 치사하고 더럽지만, 내 스마트 폰을 가지기 전까지 나는 이렇게라도 해서 어른들에게 스마트 폰을 빌려 써야 한다. 특히, 오늘은 모든 친척들이 모인 날인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종의 스마트 폰을 골고루 만져볼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혼자 외롭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쉬운 일은 절대 없다. 최선을 다해 공들이고 있는 내 작업에 불청객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내 화려한 무대에 뛰어든 불나방 같은 녀석은 아빠의 동생, 그러니까 고모의 아들이었다. 나이는 한 살 반. 그러니까 20개월도 되지 않은 애송이였다. 이제 걸음마를 떼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생각 없는 녀석이다. 녀석은 나의 고귀한 무대에 갑자기 뛰어들더니, 정말 우습지도 않은 동작으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정말 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냥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모두 그 녀석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우습지도 않은 녀석의 몸부림을 보면서 어른들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그랬다. 이미 나는 그 한 살 반밖에 안 되는 녀석에게 밀려 백댄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나는 춤을 멈추고 어딘지도 모를 구석에 주저앉아 버렸다. 서러운 것은 아무도 내가 춤을 멈췄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엄마와 아빠조차도. 화가 난다기보다 슬펐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뒤덮여 얼굴 주변이 온통 축축해졌다. 그렇게 절망에 빠진 사이, 녀석은 지칠 줄 모르고 연신 몸을 우스꽝스럽게 흔들었다. 설마 저 녀석은 벌써부터 깨달은 걸까? 나는 저 나이 때 저러지 못했는데, 녀석은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세상을 알아차린 건지도 모르겠다.


서러움이 복받치던 그때 엄마가 내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말없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역시 엄마밖에 없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꼭 안았던 엄마가 내 양손을 잡더니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저 엉터리 같은 동작에 맞춰 손뼉 치게 만든 것이다. 태어나 이런 굴욕은 처음이다. 엄마는 나의 이 모멸감을 상상치도 못한 채, 계속 내 손을 꼭 잡고 신나게 박수를 쳤다. 내 손은 이제 더 이상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손이 아니었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웠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내 손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으앙!”

멋도 모르고 춤을 추던 그 바보 같은 녀석이 갑자기 넘어졌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쌤통이다. 녀석에게 혀를 내밀며 놀려주고 싶었지만,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수 없었다. 망설임 없이 나는 녀석보다 더 큰 목소리로 따라 울었다. 그제야 불공정한 판이 깨졌다. 어른들은 현명하게 녀석과 내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각각의 대처 방안을 제시했다. 덕분에 녀석의 손에는 달콤한 요구르트가, 내 손에는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새로운 기종의 스마트 폰이 쥐어졌다. 인생은 또 이런 맛에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105동 아파트의 경비아저씨가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꽤 많은 경비아저씨들이 105동 아파트를 거쳐 갔지만, 이렇게 조용한 경비아저씨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청소 아주머니는 새로운 경비아저씨가 말이 하도 없어서 처음에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1203호 아주머니가 건넨 음료수를 받으며 경비아저씨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오해가 풀렸습니다. 말도 별로 없고 표정도 별로 없는 경비아저씨는 취미도 고상해서 거의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습니다. 시끄럽다는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사실 요즘 경비실에는 좀처럼 라디오나 TV를 틀어 놓지 못했는데 새로 온 경비아저씨가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은 주민들도 딱히 뭐라고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통장 아주머니는 아파트가 고급스러워졌다고 칭찬까지 했습니다. 그런 경비아저씨 덕분에 나도 요즘은 클래식 음악이 좋아졌습니다. 아무래도 조용한 경비아저씨는 말보다 음악으로 105동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209호 민정이가 얼마 전 예쁜 아가를 낳았습니다. 덕분에 민정이가 친정에서 산후조리 차 얼마간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민정이는 내게 언제까지나 귀여운 아가일뿐인데, 그런 민정이가 또 다른 아가를 낳았다니! 민정이 어머니도 저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민정이를 낳았을 때 보다 더 어쩔 줄 몰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민정이 어머니의 머리 위엔 흰머리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30년 전 민정이를 바라보며 지었던 따뜻한 미소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민정이의 아기, 그러니까 민정이의 딸 이름은 유나입니다. 유나.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지만, 유나가 아직 너무 어려서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어쩔 수 없이 베란다 창문으로 들리는 유나의 울음소리로만 그 존재감을 확인할 뿐입니다. 


 유나를 낳고 3개월이 지나자 민정이는 어여쁜 유나를 친정에 맡기고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나를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론 좋았습니다. 유나를 친정에 맡기러 오는 민정이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민정이가 유나를 맡기고 회사로 출근을 하면, 민정이 어머니는 제일 먼저 유나에게 우유를 먹입니다. 유나가 우유를 다 먹고 나면, 민정이 어머니는 유나가 트림을 할 수 있도록 등을 토닥여 줍니다. 인형만큼 작은 유나는 할머니의 따뜻한 토닥임에 귀여운 트림을 합니다. 우유를 먹고 잠에 든 줄 알았던 유나가 갑자기 웁니다. 유나 할머니는 기저귀를 확인하고 기저귀를 벗깁니다. 정성스레 씻깁니다. 새로운 기저귀를 채워줍니다. 그러다 꼬물거리던 유나가 다시 울기 시작합니다. 유나 할머니는 다시 우유를 먹입니다. 트림을 할 수 있게 다시 토닥입니다. 얼핏 보면 참 그림 같은 일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반복되는 바쁜 일상입니다. 민정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잘 몰랐는데, 이제와 보니 어린 아가를 온전한 사람으로 키워 내는 일은 기쁜 만큼 참으로 고달픈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유나가 처음으로 유모차를 타고 외출을 하는 날입니다. 고작 105동 아파트 옆 놀이터였지만, 유나에겐 꽤 놀라운 모험이 될 겁니다. 예전엔 민정이가 나와 놀았던 놀이터였는데, 이제 민정이의 딸 유나가 나와 있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물론 지금의 놀이터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놀이터 바닥에 깔렸던 모래가 없어지고, 고무로 된 바닥재가 깔려 있습니다. 철제로 만들어졌던 놀이기구들도 지금은 대부분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놀이기구들로 바뀌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새롭게 바뀐 이 놀이기구를 이용할 아이들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지금의 놀이터는 뛰어놀기엔 아직 어린 아가들이 어른들과 함께 나와 바람을 쐬거나, 아가들을 데리고 나온 어른들의 이야기 쉼터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 외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온 유나는 유모차 포대기 속에서 손과 발을 꼬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작은 손이 세상 어떤 꽃 봉오리보다 더 예쁜 것 같습니다 때마침 어디선가 꿈결처럼 클래식 오보에 연주곡 멜로디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경비아저씨가 아름다운 배경음악을 틀어 주신 것 같습니다. 음악소리에 맞춰 봄바람처럼 꼼지락 거리던 유나의 손과 발동작이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툭 멈춥니다. 대신 새근거리는 유나의 숨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옵니다. 그 평화롭고 신비스러운 광경을 경비실 앞을 서성이던 경비아저씨도 가만히 지켜봅니다. 늦은 오후, 그렇게 105동 아파트 놀이터에는 아스라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1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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