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수가 적은 105동 경비아저씨는 오늘도 기다란 악기 가방을 들고 출근했습니다. 한가하고 무료한 오후가 되면 경비아저씨는 남몰래 기다란 악기 가방 열고 기다란 악기를 꺼냅니다. 악기 이름이라면 피아노나 기타 정도밖에 모르는 나였지만, 그 악기가 오보에라는 것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비아저씨가 자주 듣는 클래식 연주곡 대부분이 오보에 연주곡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경비아저씨는 오보에를 꺼내 정성스럽게 닦습니다. 마치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를 목욕시키는 것처럼. 먼지 하나도 달라붙을 수 없을 만큼 오보에라는 악기가 반짝반짝해질 무렵, 경비아저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경비아저씨의 오보에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걸까요? 아쉽게도 아닙니다. 아저씨는 정성스레 닦은 오보에를 다시 가방에 넣고 연주곡 음악을 틉니다. 그 연주곡 음악에 맞춰 막대기 하나를 들고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시늉을 합니다. 아마도 아저씨만의 오보에 연습방법인 것 같습니다. 부디 언젠가는 경비아저씨가 직접 연주하는 오보에 연주를 들어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보에 선율을 타고 올해도 어김없이 화려한 봄꽃의 향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듭니다.
<경축! 장미아파트 재개발조합설립인가 승인!>
처음에는 이 플래카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단어 자체도 어려웠지만, 왜 저런 단어들이 축하받을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의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한마디로 이 아파트 재개발이 어느 정도 확정이 되었다는 소리였습니다. 사실 아파트 재개발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왜 재개발이라는 것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머지않아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될 거라는 사실이 놀랍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안타까운 소식이 또 들려왔습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행기 사고도 아니고 수백 명이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배가 가라앉을 동안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까? 왜 빠져나오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꼼짝없이 죽어가야 했던 어린 학생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어땠을까요?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 따위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공포였을 겁니다. 참담하고 참혹합니다. 그럼에도 재개발조합인가를 축하하는 플래카드는 여전히 아파트 여기저기서 신나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세상이 잔인한 이유는 어쩌면 행복과 불행이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찾아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원인 규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방송에선 바다에 가라앉은 배와 사람들 이야기로 연일 시끄럽습니다. 각종 방송사들은 희생자들을 추모한다는 이유로 예능 방송을 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도 TV에 비친 높으신 분들은 진심 어린 애도보다 이참에 TV에 나와 본인들이 얼굴을 알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개그맨들도 하기 어려운 코미디를 보여주며 그들 스스로 예능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한심한 꼴이 보기 싫어서, 그렇게 좋아하던 TV를 당분간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
제아무리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한, 세상은 또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재개발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아파트도, 소중한 생명을 안고 안타깝게 사라진 커다란 배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떠가는 구름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고, PD님!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편집 마무리가 아직 남아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가려고요. 근데, 오늘 방송인 건 알고 계시죠?”
“그럼요,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방송에 나오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아휴, 제가 더 감사하죠. 근데,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처음엔 저희 제안 거절하셨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건지 궁금해서요.”
“그게.......”
“혹시, 얼마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 때문인가요?”
평소 말이 없던 경비아저씨가 105동 803호 사는 방송국 PD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방송국 PD도 그런 아저씨를 따라 고개를 끄덕입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요. 원인도 책임도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네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어떤 지옥에서 살아가는지.”
말이 별로 없던 경비아저씨가 저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봅니다. 더구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까지 하신다니! 803호에 사는 방송국 PD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특이한 사연을 가진 일반인들을 취재해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경비아저씨에게도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그 사연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그래서 혹시나 그 방송을 못 보게 될까 봐 걱정도 됩니다. 채널 선택권이 없는 나로서는 아파트 주민들이 그 방송을 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경비 아저씨의 출연 소식이 아파트 주민들에게 많이 알려졌는지 그 시간에 꽤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803호 PD가 만든 방송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나는 경비아저씨의 눈물겨운 사연을 지켜보며, 처량한 낙엽만 툭툭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2016년 10월 딸에게 보내는 이 노래 ]**
“회의 시작합니다. 새로운 아이템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김 PD는 작가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이번 주에도 별 다른 아이템이 없는 듯했다. 그때, 구석에 앉아 볼펜을 만지작거리던 막내 작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배 작가들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김 PD는 눈짓으로 어서 말해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 달 전 시청자 제보로 올라왔던 사연인데요.”
막내 작가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한 할아버지가 한강 고수부지에서 매주 금요일 밤마다 오보에를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선배 작가들은 조금 짜증 난 눈빛으로 그 이야기를 왜 또 꺼내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내 작가는 지난주 금요일 날 한강고수부지에 직접 나가 보았는데 할아버지의 오보에 연주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며 마치 무림의 고수를 발견한 얼굴로 자신의 아이템을 계속 어필했다. 또한 그 동네에는 입 소문이 퍼져서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주를 듣기 위해 미리 고수부지에 나와 기다린다고도 했다. 이상한 것은 할아버지가 멋진 연주를 끝내고,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김 PD는 이상하게 막내 작가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지만, 다른 작가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자신의 속내를 감췄다. 아이템 회의가 다 끝나고 난 뒤, 김 PD는 회의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막내작가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그 할아버지 보려면 한강 어느 지구로 가야 해?”
막내작가가 얘기해 준 장소는 성수대교 바로 밑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성수대교에도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조명이 켜졌다. 강바람도 시원하게 불었다. 약간 비릿한 물비린내가 났지만, 그런대로 분위기기가 좋았다. 편의점에서 샀던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시며 여유로운 행복감에 젖어들 무렵, 어디선가 오보에 소리가 바람처럼 들렸다.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김 PD가 듣기에도 꽤 듣기 좋은 오보에 소리였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슬픔 같은 것이 진하게 느껴졌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오보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보에 연주자는 강물과 닿을 것 같은 강가 끝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오보에 선율에 비해 늙은 연주자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였다. 김 PD는 카메라맨과 같이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오보에 소리에 빠져들었다.
막내작가 말대로 할아버지는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보에를 케이스에 담으며 도망치듯 달아났다. 김 PD는 조용히 할아버지 뒤를 밟았다. 작고 왜소해 보이는 할아버지였지만, 걸음걸이가 무척 빨랐다. 이러다 놓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김 PD는 서둘러 할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잠시 만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 사이 김 PD는 할아버지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숨을 몰아쉬는 김 PD를 쳐다봤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김 PD는 얼른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조용히 김 PD의 명함을 보던 할아버지는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김 PD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다. 김 PD는 할아버지를 쫓아가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오늘은 카메라맨도 없었고, 다음 주에 다시 올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김 PD는 기억을 더듬으며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더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맥주 한 캔을 들고 만 원 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지폐를 받은 편의점 할머니가 힐끗 김 PD를 쳐다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그냥 돌아설까 하다가, 김 PD는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얼었다.
“아까 보니까 오보에 할아버지한테 말을 걸던데, 혹시 방송국 사람인가? 아님 신문기자?”
방송국 PD라고 짧게 대답하자, 할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시냐고 묻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할아버지가 나름 유명해서 종종 그런 사람들이 말을 걸었지만, 그 할아버지는 절대 인터뷰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 김 PD도 괜히 헛수고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김 PD가 돌아서려는데 편의점 TV에서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김 PD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명함을 할머니에게 건네며 제보할 것이 있으면 해달라고 짧게 부탁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물었다.
“무슨 프로그램하는데?”
“저거요.”
결국 할머니는 오보에 할아버지 허락이 없는 한 방송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할아버지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 PD는 이야기를 다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김 PD는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보에 할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냐고. 그러자 할머니는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그 양반 원래 연주 끝나고 나면 여기 들러서 소주 마시는 게 일이었거든! 오늘은 젊은 양반 때문에 못 그러고 간 거고.”
이야기의 시작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보에 할아버지의 딸은 오보에를 전공한 음대생이었는데, 졸업 연주회를 앞두고 할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빚쟁이 들을 피해 도망 다녔고, 집안의 가장이 된 딸은 학교 졸업을 미루고 여기저기 레슨을 하러 다녔다. 어느 날 오보에 레슨을 하러 가기 위에 성수대교를 건너던 할아버지의 어여쁜 딸이 거짓말처럼 죽어 버렸다. 20여 년 전 성수대교가 어이없이 무너지던 그날이었다. 자신의 딸이 성수대교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는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딸이 연주하던 오보에를 배우기 시작했다. 열심히 연습했던 할아버지는 이제 딸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금요일 밤마다 이곳에 찾아와 홀로 오보에 연주를 했다. 그렇게라도 죽은 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 PD는 오보에 할아버지 사연을 듣고 맥주 한 캔을 더 마셨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막내작가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김 PD가 할아버지를 만났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김 PD는 막내작가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아이템은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그래서 다른 아이템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김 PD는 흔들거리는 차창 밖을 쳐다봤다. 저 멀리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성수대교가 화려한 불빛을 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철없이 반짝이는 불빛에 김 PD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디선가 그리운 딸을 그리며 연주하던 할아버지의 구슬픈 오보에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