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출근하듯 산책을 하던 301호 아저씨가 요즘 통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재취업을 하신 걸까요? 아니면, 신상에 문제가 생기신 걸까요? 언제나 함께였던 301호 아주머니 역시 자주 보이지 않아 더욱 걱정이 됩니다. 유일하게 내 존재를 알아봐 주시던 분이라서 더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입니다. 다행히 보름이 지나고 301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아저씨의 모습은 수척해 보였고, 어딘가 모르게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301호 아주머니가 그런 아저씨를 부축해 택시에서 내리자, 경비아저씨가 뛰어나와 커다란 짐 가방을 들어주셨습니다. 짐작컨대 301호 아저씨는 병원에 입원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무슨 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아저씨의 창백하고 수척해진 얼굴이 얼마나 힘든 병을 앓았는지 말해줄 뿐입니다. 며칠 뒤, 301호 아저씨는 다시 놀이터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301호 아저씨는 아직도 걷는 것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301호 아저씨 곁에는 301호 아주머니가 항상 함께 합니다. 아주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느라 예전보다 우리를 쳐다보는 시간이 줄어든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아저씨가 혼자 걸어 다니시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301호 아저씨가 하루라도 빨리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들어 공기의 질이 나빠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파트보다 나무가 울창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확실히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특히 편서풍이 많이 부는 봄날이면 나무인 나조차도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공기가 탁해져서 사람들은 집에 틀어박히거나 밖에 나오더라도 자동차만 타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놀이터에 나와 노는 아이들을 보는 일은 이제 아주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이상한 전염병이 돌아 초등학교 학생들이 임시 방학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혹시나 아이들이 놀이터로 나와 놀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헛된 꿈이었습니다. 오히려 지나가는 아이들 머리카락조차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간혹 외출을 하는 사람들조차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언젠가 SF영화에서 보았던 암울한 미래가 현실이 된 것 같아 걱정도 됩니다. 덕분에 오늘도 저만치 보이는 노란 버스에 올라타는 아이들의 뒤통수만 열심히 쳐다봅니다.
스마트 폰을 그렇게나 좋아했던 309호 꼬마 민수도 이젠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노란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스마트 폰을 좋아해서 스마트 폰만 있으면 문을 콕 닫고 방에 들어가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민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무척이나 서운한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민수 어머니가 베란다에 나와 민수가 등교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민수 어머니는 민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았지만, 민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걸어갔습니다. 민수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민수 어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일부라도 생각했던 자식들을 품에서 떠나보냅니다. 누군가는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해서 꼭 쉬운 일은 아닙니다. 화려한 꽃을 피우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연한 과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통을 동반한 수고로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고, 뜨고, 눈과 비가 내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할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 당연하고 쉬운 일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8년 5월 한 없이 가벼운 나의 고독 ]**
“엄마도 같이 갈까?”
“에이, 그럼 안 되지.”
“왜, 엄마랑 같이 가는 거 싫어?”
“내가 애야? 그리고 엄마가 같이 가면 나 완전 왕따 될지도 몰라.”
괜히 해 본 말이었지만, 그 괜한 말에 지선은 가슴이 무너졌고 눈물도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제 고작 12살 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어 싸던 짐을 묵묵히 쌌다. 12살 난 아들 민수는 엄마가 그러든 말든 그저 스마트 폰 게임에만 열중할 뿐이다.
민수가 4살 때, 지선은 갑상선 수술 때문에 며칠 동안 민수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태어나 한 번도 엄마와 떨어진 적 없던 민수는 짐을 가지고 현관을 나서는 지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영영 보지 못할 사람처럼 지선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지선은 아들이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회복실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도 지선은 자신보다 민수가 더 걱정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민수는 지선이 없는 하루를 못 참고 밤새우느라 남편과 할머니를 고생시켰다는 말을 들었다. 수술을 하고 이틀 만에 만난 민수의 얼굴을 지선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엄마가 보고 싶었다며 와락 안긴 민수의 빨간 볼을 어루만지며 지선은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지만 이제 민수는 12살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지선의 품을 자꾸만 떠나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민수는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자기 전에 엄마한테 꼭 전화해. 알았지?”
“알았다고.”
민수가 과학 캠프를 떠나는 날 아침, 집을 나서는 민수의 뒤통수에 대고 지선은 잘 다녀오라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민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만 했다.
“어!”
민수가 현관문을 나간 뒤, 지선은 아파트 베란다로 달려갔다. 민수의 뒤통수라도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민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선은 베란다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민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여주고 가지.’
가슴팍에서 서늘한 서운함이 번지더니 몸 전체가 아려왔다. 물론, 지선도 알고 있었다. 품 안에 자식이란 것을. 그래서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한다 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서운함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이미 지선은 사춘기로 향하는 민수의 모든 행동에 상처를 받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런 순간들은 많아질 것이다. 문득, 지선은 어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도 내 뒤통수를 보며 나처럼 서운했을까? 아마도 그러셨을 것이다. 그제야 지선은 깨달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 부모의 고독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민수를 보내고 집에 혼자 앉아 있으니 주마등처럼 민수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민수가 자신의 가슴팍에 처음 안기던 날부터, 사탕보다 엄마가 더 좋다던 민수의 발그레한 얼굴도, 밤새 열병을 앓으면서도 엄마 손을 놓지 않았던 민수의 작은 손가락도. 지선은 하나도 틀림없이 모두 다 기억해 냈다. 지선에겐 남편보다 민수가 더 큰 위로였고, 구원이었다. 지선은 민수만 곁에 있으면 그 어떤 외로움도 고통도 느낄 틈이 없었다. 어린 민수에게 지선은 세상의 전부였고, 지선 역시 민수가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민수에게 지선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지선 없이 민수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늘어갔고, 앞으로도 민수가 지선 없이 해야 할 일들은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지선이 민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지선은 그런 생각만으로도 고독했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때문에 민수가 없는 2박 3일은 지선에게 너무도 막막한 시간이었다. 지선의 좋은 친구는 민수가 없으니 그동안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말했지만, 지선은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 물론, 민수가 돌아오면 씻은 듯이 나을 신기한 병이었다. 밤 9시가 되자 지선은 전화기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민수에게 전화가 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지선은 그렇게 민수의 전화를 기다리다 새벽녘이 돼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지선을 흔들어 깨웠다. 남편이었다. 지선은 몸이 아프다며 다시 돌아누웠다. 남편은 그런 지선에게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지선은 그런 남편이 귀찮을 뿐이다.
남편은 홀로 출근을 하고 지선은 한 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지선은 문득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민수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지선은 민수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기 위해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하고 싶은 일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선은 평소에는 쓰지 않았던 입욕제를 사용해 드라마에서 보던 여유로운 거품 목욕을 해보았다. 은은한 입욕제 향기와 분위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깨끗해진 몸과 마음으로 이번에는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대 앞에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 본 적이 얼마만이던가? 정성스레 기초화장을 하고, 평소에 하지 않았던 눈 화장을 시작했다. 아이섀도와 아이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도 했다. 립스틱으로 화장을 마무리를 하며 지선은 겨울을 봤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아까보다 훨씬 더 기분은 좋아졌다. 화장에 어울리는 옷을 찾으며 옷장을 뒤적이다가 지선은 백화점에서 옷 한 벌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서둘러 굽이 높은 구두를 꺼내 신고, 똑딱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백화점으로 향했다.
지선이 CF 속에만 나오는 행복한 여자처럼 우아하게 백화점 여성 브랜드 매장을 걸었다.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선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봤다. 민수였다.
“엄마, 나!”
“그래, 민수야! 근데, 너 왜 어젯밤에 전화 안 했어?”
“아, 어제? 깜박했지. 미안!”
“근데 캠프는 어때? 재미있어?”
“뭐, 그냥 그렇지.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아니, 왜? 너 캠프 가는 거 좋아했잖아.”
“몰라! 그냥 따분해!”
“이왕 갔으니까 재미있게 놀아.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알았어. 근데 엄마! 여기 밥이 너무 맛이 없어. 엄마가 만든 돈가스 먹고 싶다.”
“그래? 알았어. 엄마가 내일 돈가스 준비해 둘게. 근데, 내일 몇 시에 도착할 거 같아?”
“글쎄, 오후에 도착하지 않을까?”
“오케이, 알았어. 우리 아들! 엄마가 내일 마중 나갈게. 돈가스도 준비해 두고.”
“응, 내일 봐!”
전화를 끊고, 지선은 자신이 어느새 식품매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수와 전화 통화를 시작하면서 이미 지선의 발걸음은 식품매장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선의 몸과 마음은 새털처럼 가뿐해졌다. 온몸에 생기가 돌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번졌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서인지 지선은 뾰족한 구두가 민망할 정도로 식품매장을 끝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런 지선의 모습에선 그 어떤 고독도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