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던 시공사 선정이 끝나자, 재건축과 관련된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루가 마치 1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재개발사업시행인가를 받았다는 플래카드가 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분양신청을 받는다는 플래카드로 바뀌었습니다. 드디어 분양신청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를 내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갔던 집주인들이 아파트 단지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 중에는 몇 년 전 이사를 갔던 세찬이도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세찬이를 보니 속없이 반갑기만 합니다. 물론, 세찬이는 세찬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찬이에게 처음으로 숫자 세는 법을 배웠던 그날이 문득 떠오릅니다. 주차장에서 혹은 놀이터에서 세찬이와 함께 야구를 하던 상수와 꼬마 쌍둥이 녀석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들만큼은 고스란히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세찬이와 상수, 그리고 쌍둥이들 기억 속에도 그 시절 추억들이 남아 있을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추억 속 어딘가에 녀석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던 볼품없는 어떤 나무도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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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아파트 재개발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105동 아파트에는 3번의 가을이 머물다 갔습니다. 네 번째 가을이 막 찾아왔을 무렵, 아파트 주민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덕분에 아파트 이주가 완료된 집들은 마치 이가 빠진 자리처럼 시리고 아픈 흔적으로 남겨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시리고 아픈 흔적들이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집이 빠져나간다는 겁니다. 처음 이주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하루에 한집 꼴로 빠져나갔었는데, 지금은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듯 우수수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파트 모습은 옥수수 알이 듬성듬성 털려버린 옥수수 대처럼 처량해 보입니다.
오늘은 309호 민수네 집이 이사를 나갔습니다. 그동안은 차마 지켜볼 용기가 없어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텅 비어버린 309호를 멍하니 들여다봅니다. 텅 빈 309호 안방에는 가구가 놓여 있던 먼지 자국만 허물처럼 남아 있습니다. 꼬마 민수가 덩실덩실 춤을 추던 거실에는 자기들끼리 구르다가 뭉친 먼지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던 민수네 집이 이렇게 황량한 곳이었는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마치 화장이 벗겨진 여자의 맨 얼굴처럼, 그렇게 309호의 민낯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50대가 되어도 꽤 봐줄 만했던 것 같은데, 50살도 다 먹지 않은 아파트는 정말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낡아 보입니다. 문득, 105동 아파트를 처음 봤을 때 생각이 납니다. 어찌나 위풍당당하고 든든해 보이던지 그때는 평생 105동 아파트에 기대어 살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105동 아파트가 뺏어간 내 일조권을 찾겠다고 갖은 노력을 다해 가지를 뻗었던 기억도 납니다. 어느새 나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햇빛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노쇠하고 낡아빠진 105동 아파트가 내게 의지하고 싶을 만큼 덩치가 커진 지금, 빈틈없는 세월을 밟고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이별은 하루하루 무섭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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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먼지처럼 내려앉은 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아파트는 한층 더 황량하고 황폐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밤이 되면 더 환한 빛이 나지만, 사람들이 떠난 아파트는 앙상한 골격만 남아 마치 살이 썩어 비틀어진 해골처럼 보입니다. 땅속에 깊이 박혀있는 뿌리부터 이파리 끝까지 스멀스멀 서러움이 번져 옵니다. 그 서러움 때문인지 오늘은 뿌리에 파고드는 벌레들의 작은 몸부림까지도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아파트 불빛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예민한 감각만 늘어납니다. 덕분에 105동 아파트 불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208호 민정이네 집이 이사를 가는 날입니다. 오늘은 민정이도 이사를 도우러 왔습니다. 어느새 민정이도 세찬이처럼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중년 부인이 되었습니다. 민정이는 유나의 손을 꼭 잡고 이삿짐 하나하나가 컨테이너 박스에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런 민정이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입니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민정이에게도 이 아파트는 추억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멍하니 서 있던 민정이가 유나의 손을 잡고 갑자기 경비실 앞으로 뛰어갑니다. 경비아저씨에게 작은 삽을 하나 빌리더니 놀이터 벤치 쪽으로 걸어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민정이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작은 삽으로 내 주변을 여기저기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민정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찾았다!”
“엄마, 그게 뭔데?”
“이거? 타임캡슐!”
민정이가 찾아낸 유리병의 뚜껑은 이미 녹이 슬어 흙빛으로 변해있었지만, 유리병 안에 든 몇 가지 물건과 메모지는 그대로였습니다. 민정이는 말갛게 웃으며 유리병 안을 들여다봅니다. 유나는 타임캡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 메모지 안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하지만 민정이는 타임캡슐 안에 있는 물건들을 유나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민정이는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혼자 품고 105동 아파트를 영영 떠났습니다.
105동 아파트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이사를 하게 된 집은 301호였습니다. 두 분의 짐은 다른 집들보다 훨씬 더 단출해 보였지만, 이상하게 이사를 하는 시간은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다른 집들처럼 이삿짐센터 서비스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트럭과 인부 몇 명만을 고용해서 짐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가 늦어진 또 다른 이유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자꾸만 돌아보고 또 돌아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저씨는 짐을 다 실어 놓고도 105동 아파트 주변을 천천히 돌며 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파트 단지 단풍들은 어느 때보다 아름답습니다. 길 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기 딱 좋은 만큼. 그렇게 105동의 마지막 단풍을 눈에 담고 또 담으며 301호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고향과도 같았던 아파트를 떠났습니다.
모두가 떠난 105동 아파트의 밤은 공포영화 속 흉가보다 더 참혹하고 무서웠습니다.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아파트는 어쩌면 귀신들이 숨어 있기 딱 좋은 장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로등 불빛도 별빛도 없이 어둠만 가득 내려앉은 밤, 105동 아파트는 더 이상 광합성을 하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몸뚱이를 겨우겨우 가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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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의미 없이 지났습니다. 나는 죽음을 예약해 놓은 것처럼 비장하게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덕분에 시간은 달팽이보다 느리게 지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지난 몇 주간 아파트 단지는 무덤처럼 고요했는데, 오늘 아침은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각종 기계 소리들이 음산하게 들려옵니다. 설마, 벌써 재건축공사가 시작된 걸까요? 마지막 출근하셨던 경비아저씨의 말로는 공사가 내년 봄에나 시작될 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저씨의 예상이 틀렸나 봅니다. 청소하는 사람이 없어서 각종 낙엽들이 아파트 단지에 눈처럼 고대로 쌓여 있는 초겨울 아침, 서늘한 한기가 뿌리까지 파고듭니다.
재건축공사가 시작되면, 105동 아파트와 나무들 중에 어떤 것이 먼저 사라지게 될까요? 처음엔 차라리 내가 먼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 먼저 사라지든 그 공포의 양은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누군가의 말처럼 모든 게 참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이렇게 헛되게 사라질 운명이었다면, 왜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뜨겁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경을 갉아먹을 것 같은 기계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옵니다. 먹먹하던 하늘에서 먼지 같은 무언가가 흩날리기 시작합니다. 세상과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하는 오늘, 얄궂게도 설렘 가득한 첫눈이 팔랑거리며 춤을 춥니다. 속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팔랑거리는 첫눈처럼 그렇게 나도 철없이 이 순간을 버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에필로그 : 도대체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여기 나무들은 그냥 다 잘라버릴 건가요?”
“네, 그래야죠!”
“이런 나무들은 이목 해서 다른 곳에 심어도 될 것 같은데.”
“에이, 이런 나무들은 이목 하기 어려워요. 이목 하려면 비용이 꽤 많이 들거든요.”
“여기 이 나무도요?”
“그럼요. 저기 있는 소나무들 빼고는 거의 다 잘라낼 겁니다.”
“안타깝네요. 사실, 제가 이 아파트 살면서 이 나무들 보는 재미로 살았거든요, 특히 이 나무는 왠지 더 짠하고 그러네요.”
“하하, 진짜 좋아하셨나 보네요. 여기까지 다 찾아오시고.”
“다 잘라 버린다고 하니, 또 괜히 왔나 싶네요. 근데, 이렇게 잘라낸 나무들은 다 어떻게 되나요?”
“용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쓸 만한 것들은 목재로 쓰기도 합니다. 근데, 이 녀석은.......”
“목재 감도 못 되나요?”
“나무가 너무 물러서 목재로도 못쓰죠. 나무젓가락이나 이쑤시개 만들 때 쓴다면 모를까. 아니면 공사장 같은 곳에서 땔감으로 쓰일 수도 있고.”
301호 아저씨가 불쑥 찾아와 나무를 베고 있는 인부들과 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반가운 마음보다 이제 안타깝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301호 아저씨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뭐 그래도 이제 상관은 없습니다. 마지막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지금, 이름 한 번 불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301호 아저씨가 이렇게 다시 찾아와 내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신다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그런데, 301호 아저씨는 정말 내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걸까요?
궁금할 틈도 없이 인부들은 오늘 안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각오로 103동에 있던 장비들을 모두 105동 앞에 옮겨 놓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전기톱과 굴착기가 번쩍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봅니다. 처음엔 상관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105동 아파트보다 내가 먼저 잘려나간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겁도 납니다. 저만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우아하게 서 있는 소나무들이 괜히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저 무시무시한 기계들에 의해 무참히 잘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이제와 소나무처럼 이목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쓸 만한 이쑤시개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라도 다시 무언가로 태어나 이름 있는 무엇으로 잠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기계들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합니다. 눈이라도 있으면 질끈 감고 싶고, 다리라도 있으면 저 멀리 도망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옆구리에 박히는 전기톱 칼날의 현란한 움직임을 온몸으로 저항할 뿐입니다. 눈송이처럼 새하얀 살점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첫눈과 함께 미친 듯이 흩날립니다. 그렇게 105동 옆에 살았던 이름 없는 나무는 살점인지 첫눈인지 모를 것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잔인한 이별을 합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