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경아 Sep 30. 2024

18화. 어쩌다 마주친 동창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조용하던 105동 아파트에 전에 없던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바쁜 출근시간에 607호 아주머니가 908호 아주머니의 차를 들이받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민들이 보유한 자동차 수에 비해 주차장이 턱도 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파트가 지어질 40년 전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을 거라고 건축업자들이 상상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이 되면 아파트 주민들의 신경전이 장난 아닙니다. 주차공간이 부족해서 주차통로에 일단 차를 세우고, 나중에 이리저리 차를 밀어서 빼야 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요즘에는 105동 아파트 단지 안에 도저히 차를 세울 수 없어 도로 한쪽에 임시 주차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주차 문제로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소란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급기야 908호 아주머니의 신고로 105동 아파트 주차장에 경찰까지 출동했습니다. 덕분에 105동 아파트 주차장은 명절날 고속도로처럼 사람과 자동차로 꽉 막혀버렸습니다. 경찰들은 우선적으로 출근을 못하고 있는 다른 차들을 주차장에서 빼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평소 조용하던 경비아저씨도 오늘 아침은 무척 부산스럽고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이야 어떻든 말든 607호 아주머니와 908호 아주머니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야! 너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어머, 피의자님! 왜 갑자기 반말을 하세요? 저 누군지 아세요?”

 “사람이 살다 보면 몰라 볼 수 도 있는 거지. 고작 그것 때문에 사람을 이렇게 미친년 만들어?”

 “어머머, 진짜 미쳤나 봐! 지금 차를 들이받은 사람이 누군데 이러시는 거예요? 여기요, 경찰 아저씨! 이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시는 거예요?”

 “야! 너 정말!”

 “그만해. 여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충격적인 것은 908호 아주머니와 607호 아주머니가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는 겁니다. 뭐 어쨌든 두 사람의 시시비비는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요란한 소동을 일으켰던 두 사람은 나란히 경찰서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   2012년 6월 주차장에서 어쩌다 마주친 동창   ]**


 "잠시 만요! 같이 올라가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어떤 여자가 아파트 현관문 안쪽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선영은 급한 마음에 열림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하지만, 선영이 누른 것은 열림 버튼이 아니라 닫힘 버튼이었다.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황당해하는 여자의 표정이 보였다. 노기를 가득 품은 여자의 얼굴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그렇게 선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죽을 때까지 이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선영은 선영대로 민망함과 미안함에 안절부절못했다. 말할 시간만 있었다면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그 여자에게 백 번이라도 말해주고도 싶었다. 선영은 집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찜찜했다. 그 여자의 노기 어린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친 그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뒤, 선영은 그 여자와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아파트 상가 세탁소 앞이었다. 복도 저 끝에서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여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남편의 와이셔츠 몇 개와 양복 상의를 양손 가득 쥐고 있던 선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여자는 선영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여자의 눈매가 아주 사납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영은 그 여자와 점점 가까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선영이 겨우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른 척 그냥 여자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다시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선영은 그 여자가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여자는 선영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어쩐지 그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 선영은 지금이라도 아는 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타이밍을 놓친 선영은 결국 그 여자에게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며칠 전 민망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그 여자의 이름은 물론, 몇 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선영은 그 여자의 따가운 눈초리만 더 받았다. 결과적으로 선영은 이 애매한 상황을 역전시킬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놓친 것이다.


“누구라고?”

“김 선주! 정말 기억 안 나?”

“아, 그 김 선주?”

“그래, 왜 걔 별명이 개끝이었잖아, 개끝!”

“근데, 걔가 우리랑 같은 반이었다고?”

“야, 너 정말 기억상실증 걸렸냐? 김 선주는 나랑 같은 반이었고, 너하고는 같은 동아리였잖아!”

“아, 그랬나?”

“그나저나 너 이제 큰일 났다.”

“왜?”

“개 별명이 왜 개끝이겠냐? 뒤끝이 장난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한번 진 원수는 꼭 갚는다. 몰라?”

“에이, 다 큰 어른인데 설마 아직까지 그러려고.”

“야야, 사람 절대 안 변한다. 아무튼 너 조심해라!”

친구의 경고에 사실 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날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싶을 정도로. 지금이라도 그 여자, 아니 김 선주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이미 선영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선영에게 그 여자는 동창 김 선주가 아니라 그냥 한 아파트에 사는 주민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 여자를 모른 척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아 가고 있었다.


“저기, 607호 사모님?”

“아, 네. 안녕하세요!”

“607호 음식물 쓰레기에서 이런 게 나와서......”

“네? 그럴 리가요.”

“이걸 여기에 버리시면 벌금을 내셔야 하는데요. 잘 모르셨으리라 생각하고 이번만은 봐 드리겠습니다. 다음번엔 꼭 주의 부탁드립니다.”

“정말 제가 버린 게 아닌데. 혹시, 누가 신고를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가……그럼, 부탁드립니다.”

선영은 기가 막혔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했을까?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여자? 검은 봉지에 담긴 호두 껍데기를 한 손에 들고 반신반의하며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순간, 선영은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안쪽에 그 여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여유롭게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다. 마치 선영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는 비열한 미소를 머금고 선영이 들고 있는 검은 봉지와 선영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선영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으로 봐서 그 여자가 꾸민 짓이 너무도 분명했다. 노기 어린 얼굴로 선영은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순간, 여자는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은 그날처럼 무정하게 닫혔고, 선영이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마음의 평정도 산산이 부서졌다.


 “아, 정말 도대체 이 차 주인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야?”

 “안 되겠다. 여보, 오늘은 그냥 차 두고 출근하자!”

 “에이 참, 아침부터  재수 없게.”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나왔죠? 얼른 차 빼 드릴게요.”

차주의 얼굴을 보고, 선영은 얼어붙었다. 그 여자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선영의 남편은 화에 못 이겨 그 여자에게 항의를 하려고 하자, 선영은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렸다. 선영의 남편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 올라탔다. 여자도 생긋 웃으며, 선영이네 차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여자의 도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운전대에 앉아 분노에 차 있는 선영의 얼굴을 향해, 살짝 혀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선영의 아파트는 옛날 아파트라 지하 주차장이 없었고 지상 주차장도 공간에 비해 차량이 많아 주차장 통로에 차를 주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차장 통로에 주차를 하는 차들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중립으로 해 놓는 것이 주민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래야 주차해 놓은 차들을 이리저리 밀어 다른 자동차들이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선영이네 차 앞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주차를 해두었던 것이다. 선영은 자신을 향해 혀를 내밀고 있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핑’하고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쾅’하는 굉음이 들렸다. 선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선영의 차는 그 여자의 차 문짝에 코를 박고 있었고, 그 여자의 얼굴에는 벌건 분노가 폭발하고 있었다. 이성을 잠시 잃어버린 선영은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누군지는 잘 모르는 한 여자의 차를 고의로, 아니 자의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요즘 들어 다시 아파트 주민들의 이사가 늘었습니다. 아파트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올라간다고 하는데 왜 그런 걸까요? 통장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집주인들이 낡은 아파트를 전세 주고 본인 들은 신도시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게 유행처럼 번졌기 때문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105동 아파트 초창기부터 살았던 토박이들은 이제 몇 집 남지 않았습니다. 209호 민정이네 집과 202호 세찬이네 집, 그리고 단연 눈에 띄는 301호 아저씨네 집이 그렇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민정이와 세찬이네 집 꼬마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301호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젊은 청년에서 예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301호 아저씨는 얼마 전 퇴직을 하셨고 요즘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의 매일 아파트 산책을 하십니다. 301호 아저씨의 성실한 산책은 아침을 먹기 전에 시작해 사람들이 거의 출근했을 무렵에야 끝이 납니다. 산책을 마치고 나면 301호 아저씨는 경비 아저씨와 멋쩍은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늦은 아침을 드시고 다시 집을 나섭니다. 그런 아저씨의 손에는 언제나 종이 신문이 돌돌 말려 있습니다. 스마트 폰 때문에 종이 신문을 잘 보지 않는 요즘에도 301호 아저씨는 신문지에서 나는 인쇄 냄새와 종이를 넘길 때 느껴지는 손맛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저씨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오전 내내 종이 신문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점심시간이 지나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집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아저씨는 다시 집으로 들어갑니다. 늦은 점심을 드시는 겁니다. 오후 3시 반 노란 버스가 다시 아파트 단지에 나타날 무렵, 301호 아저씨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나타납니다. 아저씨가 늘 가지고 다니는 두꺼운 책의 이름은 <식물도감>입니다.


 301호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301호 아저씨는 젊은 시절부터 사람보다 나무를 좋아해서, 나무를 관찰하고 이름을 외우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실 나도 아저씨의 눈길이 조금 민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아저씨가 나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 지를. 40년 가깝게 이 아파트에 살았지만 정원 관리자를 제외한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나무를 살피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화려한 꽃나무들이나 단풍나무가 아닌 이상, 나무가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받기는 무척 힘이 듭니다. 301호 아저씨는 시선뿐만 아니라 이파리를 만지거나 거친 수피를 어루만져 주기도 합니다.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 떨어져서도 봅니다. 예전보다 시간이 많아진 요즘은 나무에 대해 더 제대로 알기 위해 식물도감까지 가지고 다니며 공부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 이 나무 이름이 박달나무였구나!”

 301호 아저씨가 식물도감을 열심히 살피다가 내 여섯 걸음 뒤에 서 있는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그런 박달나무가 마냥 부럽습니다. 나무는 예쁜 꽃을 피우는 꽃나무, 단풍나무, 혹은 과실 수가 아닌 이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벚꽃나무, 개나리, 진달래, 목련, 단풍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등등 사람들이 이름을 알고 부르기도 하는 나무는 사람으로 따지면 연예인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105동 아파트 옆에 우두커니 서서 40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그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서글픈 마음에 301호 아저씨 손에 들려 있는 <식물도감>을 넌지시 바라봅니다. 혹시나 그 책 속에 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까 괜한 기대도 했지만, 301호 아저씨는 이름을 알아낸 기쁨에 취해 박달나무만 내내 살피다가 오늘도 그냥 식물도감을 덮어버립니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내 꿈도 담담하게 덮어둡니다.


19화에서 계속.......


#만나지말았어야하는인연 #동창 #아파트에게 #연재소설


이전 17화 17화. 4살 인생이 추석을 보내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