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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Dec 13. 2015

[노래 소설]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어쩌다 마주친  그 여자의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만요! 같이 올라가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어떤 여자가 아파트 현관문 안쪽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선영은 급한 마음에 열림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하지만, 선영이 누른 것은 열림 버튼이 아니라 닫힘 버튼이었다.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황당해하는 여자의 표정이 보였다. 노기를 가득 품은 여자의 얼굴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그렇게 선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죽을 때까지 이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선영은 선영대로 민망함과 미안함에 안절부절못했다. 말할 시간만 있었다면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그 여자에게 백 번이라도 말해주고도 싶었다. 선영은 집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찜찜했다. 그 여자의 노기 어린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친 그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뒤, 선영은 그 여자와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아파트 상가 세탁소 앞이었다. 복도 저 끝에서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여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남편의 와이셔츠 몇 개와 양복 상의를 양 손 가득 쥐고 있던 선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여자는 선영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여자의 눈매가 아주 사납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영은 그 여자와 점점 가까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선영이 겨우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른 척 그냥 여자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다시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선영은 그 여자가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여자는 선영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어쩐지 그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 찰나의 순간 선영은 지금이라도 아는 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타이밍을 놓친 선영은 결국 그 여자에게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며칠 전 민망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그 여자의 이름은 물론, 몇 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선영은 그 여자의 따가운 눈초리만 더 받았다. 결과적으로 선영은 이 애매한 상황을 역전시킬 마지막 기회를 허망하게 놓친 것이다.


“누구라고?”

“김 선주! 정말 기억 안 나?”

“아, 그 김 선주?”

“그래, 왜 걔 별명이 개끝이었잖아, 개끝!”

“근데, 걔가 우리랑 같은 반이었다고?”

“야, 너 정말 기억상실증 걸렸냐? 김 선주는 나랑 같은 반이었고, 너하고는 같은 동아리였잖아!”

“아, 그랬나?”

“그나저나 너 이제 큰일 났다.”

“왜?”

“개 별명이 왜 개끝이겠냐? 뒤끝이 장난 아니라서 그런 거잖아. 한번 진 원수는 꼭 갚는다. 몰라?”

“에이, 다 큰 어른인데 설마 아직까지 그러려고.”

“야야, 사람 절대 안 변한다. 아무튼 너 조심해라!”

친구의 경고에 사실 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날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싶을 정도로. 지금이라도 그 여자, 아니 김 선주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이미 선영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선영에게 그 여자는 동창 김 선주가 아니라 그냥 한 아파트에 사는 주민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 여자를 모른 척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아 가고 있었다.


“저기, 607호 사모님?”

“아, 네. 안녕하세요!”

“607호 음식물 쓰레기에서 이런 게 나와서......”

“네? 그럴 리가요.”

“이걸 여기에 버리시면 벌금을 내셔야 하는데요. 잘 모르셨으리라 생각하고 이번만은 봐 드리겠습니다. 다음번엔 꼭 주의 부탁드립니다.”

“정말 제가 버린 게 아닌데. 혹시, 누가 신고를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말씀드릴 수가……그럼, 부탁드립니다.”

선영은 기가 막혔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했을까?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여자? 검은 봉지에 담긴 호두 껍데기를 한 손에 들고 반신반의하며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 순간, 선영은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안쪽에 그 여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여유롭게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다. 마치 선영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는 비열한 미소를 머금고 선영이 들고 있는 검은 봉지와 선영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선영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으로 봐서 그 여자가 꾸민 짓이 너무도 분명했다. 노기 어린 얼굴로 선영은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순간, 여자는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은 그날처럼 무정하게 닫혔고, 선영이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마음의 평정도 산산이 부서졌다.


##


 “아, 정말 도대체 이 차 주인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야?”

 “안 되겠다. 여보, 오늘은 그냥 차 두고 출근하자!”

 “에이 참, 아침부터  재수 없게.”

 “어머,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나왔죠? 얼른 차 빼 드릴게요.”

차주의 얼굴을 보고, 선영은 얼어붙었다. 그 여자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선영의 남편은 화에 못 이겨 그 여자에게 항의를 하려고 하자, 선영은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렸다. 선영의 남편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 올라탔다. 여자도 생긋 웃으며, 선영이네 차 앞을 가로막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여자의 도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운전대에 앉아 분노에 차 있는 선영의 얼굴을 향해, 살짝 혀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선영의 아파트는 옛날 아파트라 지하 주차장이 없었고 지상 주차장도 공간에 비해 차량이 많아 주차장 통로에 차를 주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주차장 통로에 주차를 하는 차들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중립으로 해 놓는 것이 주민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래야 주차해 놓은 차들을 이리저리 밀어 다른 자동차들이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선영이네 차 앞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주차를 해두었던 것이다. 선영은 자신을 향해 혀를 내밀고 있는 그 여자를 바라보며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핑’하고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쾅’하는 굉음이 들렸다. 선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선영의 차는 그 여자의 차 문짝에 코를 박고 있었고, 그 여자의 얼굴에는 벌건 분노가 폭발하고 있었다. 이성을 잠시 잃어버린 선영은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누군지는 잘 모르는 한 여자의 차를 고의로, 아니 자의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끝.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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