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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May 06. 2016

[노래 소설] 정인의 "장마"

녹아내릴듯한 대낮의 시내 한 복판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비 오는 거리에서 미친 듯이 춤이라도 춰야 했다. 가슴은 터질 것 같은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만히 참고만 있다가는 이성을 잃고 정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나를 이렇게 미치도록 만든 것은 오늘 아침 걸려온 정희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경숙이,  결혼한단다.”

“……!”

“근데, 걱정하지 마. 규섭이랑은 아니니까.”

“그럼, 누구?”


분명 규섭이가 아니라고 했다. 규섭이가 아니라고. 경숙이와 규섭이는 작년에 기어코 내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내 오랜 인간관계를 다 정리하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경숙이는 끝까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규섭이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내 곁에서 물러났다. 덕분에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되었다. 사랑도 우정도 모두 잃은 가련한 여인이 된 것이다. 처음엔 기가 막혀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들 덕분에 내 좁은 인간관계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는 모질다 싶을 정도로 연락을 끊었기 때문이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전화번호와 메신저 그리고 이메일까지 모두 바꾸었다. 그들과 관계된 사람 중에 유일하게 연락이 되었던 친구는 정희뿐이었다. 나의 절친이었던 정희는 처음부터 경숙이를 싫어했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며, 한동안 경숙이와 어울렸던 내게 은근한 경고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여자친구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질투 같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희의 예감대로 나는 우려했던 일을 당했고, 정희는 내 울분을 받아줄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후덥지근한 초여름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주말 아침. 나는 오랜만에 성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결국, 나는 경숙이의 결혼식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희는 끝까지 말렸지만, 나는 왠지 이 결혼식을 보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 초여름의 햇살은 장맛비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정성스럽게 한 화장이 모두 녹아내릴까 연신 거울을 보았다. 경숙이의 신랑은 규섭이가 아니라 생전 보지 못했던 뉴페이스라고 했다. 그랬겠지. 그래야 했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그럴 수 있는 경숙이가 부럽단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얼굴 화장을 확인하고 파우더 뚜껑을 꾹 눌러 닫으며, 절대 동요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입술을 꾹 다물고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신부 입장!” 


경숙이는 정말 꽃처럼 예뻤다. 화려한 예식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쉴 새 없이 식은땀을 흘렸지만, 가슴은 얼음창고에 와 있는 듯 시리고 또 시렸다. 경숙이의 신랑은 훌륭했다. 규섭이 와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와 귀태가 넘쳐흘렀다. 지루한 주례사가 끝나고, 폭죽처럼 터지는 웨딩마치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박수와 꽃가루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나는 차마 박수를 칠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선 신부를 향해 걸어가 시원스레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정말로 내게 조금이라도 시간이 주어졌다면, 나는 정신 줄을 놓고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실신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 속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식장 후미진 어느 귀퉁이에서 아주 익숙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내 눈동자와 아주 닮은 눈동자. 그것은 바로 규섭의 눈동자였다. 


규섭이는 도대체 왜 경숙이의 결혼식에 온 것일까? 규섭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뭔지 모를 두려운 마음에 황급히 예식장을 빠져나왔다. 사실 나는 경숙이의 뺨을 후려갈기지는 못해도, 경숙이 앞에 나타나 그녀의 양심에 조금이라도 스크래치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규섭이와 눈이 마주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규섭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원망스런 눈빛을 경숙이가 봐주기를 바랐던 걸까? 순간, 그렇게 원망했던 규섭이 도 참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규섭이도 피해자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고 있는 내가 미치도록 지겨웠다. 그 누가 봐도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나였다. 나만큼 비참하고 안쓰러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또 규섭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모질지 못한 내가 미워서, 그리고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머릿속에선 불쌍한 규섭이의 눈빛과 경숙이의 환한 미소가 끊임없이 교차했다.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는 경숙이 얼굴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문득, 경숙이가 나를 보지 못한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경숙이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하더라도 상처를 받는 사람은 오히려 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도 있는 권선징악은 어쩌면 현실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경숙이를 보면, 세상은 정말 불공평한 곳이다. 눈물이 났다. 사실 그동안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이런 날은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녹아내릴듯한 대낮의 시내 한 복판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그렇게 나는 장맛비처럼 지루하게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것을 연신 닦아내고 있을 뿐이다. 



>>정인의 장마 노래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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