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필요할 때
19.06.04 적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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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은 무대 위에 올려지기 위해 쓴 글이다.
혼잣말 까지도 관객들은 듣고 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이기에 과장된 표현이 있을 수 있어도
그 모두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유명한 햄릿의 대사는 매일매일 스스로 하는 혼잣말이고
[밑바닥에서_바실리사] 자유를 갈망하는 여인은 곧 나다.
모든 캐릭터를 통해 삶을 표현하고 있기에
우리는 공감이라는 능력을 극 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삶은 이 투박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가득한 무대 위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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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할 때 오는 묘한 쾌감은
어쩌면 나의 악함을 보여도 된다는 안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대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배역을 입고
평소 사회적 눈치에 가려진 나의 모습을 보이는 활동.
예술 치료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실제로 나는 연기를 하며 무대 위에서 많은 치유를 받았다.
악역을 하던 선량한 역할을 하던
용감하고 희망찬 역할을 하던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서 하는 작업이다.
연기라는 건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밖에서 안으로 자극을 하여 꺼내 든
안에서 밖으로 자극을 하여 꺼내 든
모두 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안전하게 표출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마치 무대 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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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잣대
어떤 방법으로 신경 안 쓴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건
너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 용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를 좋아한다.
결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준비하는지
아무리 어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더라도
보이지 않으면 영양가가 없는 행동이 된다.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그 압박감은
나를 늘 '없는 자'로 만들었다.
나의 마음이 진정 풍족하지 않았기에
시선에 휘둘렸겠지.
나는 이미 결핍된 자였다.
[보통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이었다.
결핍은 결핍이기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아무리 쎈 언어로 포장하려 해도
나의 결핍은 모든 곳에 묻어났다.
그게 들킨 순간에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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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얼굴을 하고 나의 표정과 목소리와 나의 몸짓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자연스러운 나는 어디로 갔는지
그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게 나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여겼던 것들이 무너진 적이 있는가
어떤 상황에 맞게 움직이더라도 내 안의 어떤 근본은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걸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불편하다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걸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시선 안에서 내가 당당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나를 알아가는 오늘이길 바란다.
보이지 않는 용기를 내게 보이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