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센티

by 지음

완벽은 내가 아니다. 내가 상상했던 완벽은 더더욱 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닿을 수조차 없는 완벽의 잔상에 눌려 멈춰있었다.


비 내려 축축한 도로 위로, 흙에서 뛰쳐나온 흙빛 지렁이. 기어간다. 꼬리에서부터 압축되었다가 간신히, 밀어내며. 나름의 박자로, 느긋한 속도로. 학교 건물을 휘돌아 올 때까지, 비슷한 곳을 지난다. 느린 걸까? 굼뜬 걸까? 무어라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지만 죽기엔 딱 좋게 생겼다. 내 앞으로 점심을 먹고 산책을 시작한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선행한다. 두 바퀴째가 아니었다면, 나도 멀리 왜소한 선처럼 보이는 녀석을 미리 발견하진 못했을 거다. 짧은 망설임이 일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달려가기엔 늦었고,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빗물 고인 웅덩이는 또 왜 이리 많은가. 침묵을 선택했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한두 무리는 잘 넘어간다 싶었지만 결국 사달이 났다. 큰 수의 법칙은 대개 통한다. 반복되는 시행에 영원히 앞면만 나오는 동전은 없다. 밟힘이라는 지금의 현실은, 확률의 세계에선 선지 된 예측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연함 앞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던 것, 그것은 앞면의 반대편이 단순히 뒷면이 아닌 생의 박탈이었기 때문이다. 되돌릴 길 없는, 잔혹한 비대칭. 따지고 보면 죽음을 방조한 것인데, 어떤 비좁은 확률에 나는 마음의 평안을 걸었던 걸까. 작은 구조 어디에, 일상적으로 버리던 것처럼 의무감과 책임감을 떠넘겨 버렸을까. 크게 꺾인 몸통이 요동치는데, 점 점 다가오는데, 의미 없는 질문을 잇고 있었다.


차라리 반으로 잘려, 단번에 두 동강이 나는 것이 나았을까. 평온하고 느리던 직선은 다차원의 흔들림이 증폭된 무엇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운 진동을 나타내고 있다. 격한 움직임에 너덜너덜한 뒷몸통이 맥놀이 친다. 그 비정상성이 더해져 지렁이는 기형적인 튕김과 착지로 몸부림치고 있다. 지렁이의 감각을 알 방법은 없지만, 고통이 전해져 온다. 통증 자체도 괴로울 텐데, 인지하지 못한 위험이 다시 덮칠 것에 대한 방비로 더더욱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다. 외면은 처절하게, 죽음처럼 달려들었다. 발이 저절로 멈춘다. 누군가는 도와야 한다. 도와야 했었던 것이 맞지만 지금이라도, 누군가.


떨어진 나뭇잎 중 큰 이파리 하나. 부러진 나뭇가지를 다시 꺾어 만든 작은 막대기 하나. 고통과 두려움에 남은 힘을 다하는 녀석은 완강히 어떤 뒤늦은 접촉도 거부하고 있었다. 몇 번, 조심스럽게 시도하다 실패한 나는, 또다시 쉬운 죽음을 생각한다. 이대로의 방치 후 재사고가 나은 결말일까. 고통만이라도 줄어들도록.


비정한 결말을 남에게 쉽게 내민다는 것. 본능적이었던, 교육을 통해 강화되었던 생명에 대한 조임쇠가 어떤 과정을 통해 느슨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한다. 보다 오래 함께한 것, 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에도 거침없이 끝을 권했다.


오랜 세월 압력에 마모되어 온 과정과, 몸부림들. 마음 최후의 박동들이 차갑게 되 튕겨 나온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 당장 보내 주는 것. 그리고 조금 연장된 시간을 위해 그를 옮겨 주는 것. 사이의 고민을 종결시킨 것은 행위로 내 몫의 도덕성을 결정치 못한 내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능숙한 손으로 지렁이를 다뤘다. 조금은 거칠 수 있는 압박으로, 밀어 옮기고 자신의 상처를 다루듯 섬세한 동작으로 들어 올렸다. 잠시, 더 격한 형태로 뒤틀리던 몸이 서서히 잔잔해진다. 체념한 것일까? 이해한 것일까? 불확실성이 줄어든 나뭇잎을 유려하게 손으로 받쳐 들어 화단 경계석 위에 내려놓는다. "촌 동네에 오래 살아서..." 무심하게 말하고는 다시 걷는 그의 곁에 붙어 섰다. 속도를 맞추어 걷다가, 물었다.


"그냥, 그대로 죽게 두는 것이 고통을 줄여 주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에게서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쳤다. 이내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저 생명도 할 수 있는 걸 다할 수 있을 만큼만 한 거죠." 하곤 연이어 말을 붙인다. "선생님이 그러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시는 게 놀랍긴 하네요..." 질문을 더 던지진 않았지만, 그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왜 그러고 있었느냐고.


걷는 동안, 끼었던 구름마저 걷히고 햇살이 간간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질문은 외려 파문을 일으키며 자라났고, 햇살같이 찔러왔다. 닿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왜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다음날은 해가 밝았다. 하루 새에 햇살이 모든 구름을 밀어낸 듯이. 굳이 햇살을 맞고 싶어 그늘을 맴도는 무리를 떠나 걸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일상과 일 사이에서 어제의 질문은 얼룩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코너를 돌아 그늘로 돌아가던 때 무심코 돌아보았을 뿐이다. 화단 경계석 위 낙엽. 지렁이가 없다. 헤아릴 틈 없이 뒤로 걸었다. 그 최후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의무라도 진 것처럼.


그것은 얼마간 더 나아간 곳에 있었다. 바짝 말라, 까맣게 굳고 뒤틀려 생기를 모두 잃어 지렁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으로. 결국, 이란 말이 시나브로 나왔다. 따가워지는 햇살을 차마 피하지 못했다. 몇 분간 서 있다 뒤늦은 수습이라도 하려 주위를 둘러보다, 알았다. 지렁이가 기어간 방향과 궤적. 우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놓였던 곳과 결국 놓이게 된 곳 사이의 공간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은 직선의 몸이던 때에 가려던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터져 버린 몸통을 디딜 때마다 고통이었을 순간들. 최후의 시간들은 어떻게 흘렀을까.


밟혔던 나는 처절하지 못했다. 무심한 수레바퀴, 세상은 여전히 그때처럼 굴러간다. 몸통이 터진 순간 진짜 치명상을 입은 자는, 기어갔다. 아니 나아갔다. 아프다고, 불공평하다고 내 몸과 마음에 난 상처가 보이지 않느냐고. 부당한 일에 부당하다고 외치기만 한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수년이 지나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부끄러움이 깊게 파고든다. 이성이 녹이지 못한 질문을 압도하는 시체의 모습. 나아간 그는 검고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닿지 못했어도, 죽어 버렸더라도, 의미가 있었는지 몰라도.

반쯤 뜯겨나간 부분이 뒤집혀 하얀 뒤틀림이 보인다. 햇살은 찬란하게, 또 잔인하게 그 위로 밝다.


돌아가는 길. 나로는 결국 닿지 못할 거란 의심을 받아 들었다. "그래, 닿지 못할 거야. 아마도" 왜인지,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저 3센티를 더 기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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